전통적 가족관념의 형성에 대하여
아마 ‘전원일기(1980~2002 방영)’라는 드라마를 모르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이다. 드라마 ‘전원일기’는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장 기간인 22년 동안 방영하면서 농촌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평가된다. 드라마 ‘전원일기’에는 이른바 ‘전통적’ 가족의 모습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 드라마 ‘전원일기’ 속 가족은 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로 이루어진 대가족 형태다. 또한 며느리는 남자 집으로 시집와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고 있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고부 갈등도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가족구조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전통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족구조로서, 유교 문화의 등장과 더불어 전통 사회에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통적’ 가족구조와 윤리는 유교, 그중에서도 성리학이 한반도에 도입된 지 수백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회 전반에 정착하였다.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300년 전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한반도의 가족 구조와 윤리는 어떠하였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전통적’인 형태로 변모하였을까?
조선 중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서류부가혼이란, 쉽게 말하면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드는 풍습을 말한다. 이는 고구려의 ‘서옥제(壻屋制,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 혼인하여 서옥에서 지내다가 자녀가 장성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풍습)’와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에도 이와 유사한 혼인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서류부가혼이 왕실을 제외하고는 전 계층에 걸쳐 행해졌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고려에서 친영례(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가는 혼례형식)가 폐하여 남귀여가(男歸女家,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가는 것) 하니 부인이 무지하여 그 부모의 사랑을 믿고 그 지아비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집안의 도리가 무너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고려 원종 대 횡천의 백성 시가대(屎加大)는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였을 때 고려에서는 남자가 장가드는 혼인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인의 양상이 조선 후기와 달랐던 만큼, 혼인 생활의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남성은 주로 처가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결혼 초기에는 대체로 처가에서 생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거주 장소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처가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의 경우 처가는 사위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고, 사위가 과거에 급제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한편 피지배층의 경우에 사위는 처가의 노동력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아들과 딸에 대한 인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 가족 관념에서 딸은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생각되었다. 결혼해서 시집가는 순간 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 하에서 딸과 외손은 아들과 친손에 비해 무가치하게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서류부가혼 사회에서 딸은 평생 자신과 함께 살며 자신을 부양해주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딸을 아들만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상속이나 제사 등에서도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았다. 딸이 낳은 외손 역시 친손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 음서(선조의 음덕에 따라 자손을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에 있어서도 차별받지 않았다.
한편 서류부가혼 사회에서는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조선 후기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 후기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죄악시되었던 반면, 서류부가혼 사회에서 여성의 이혼과 재혼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양가 부모(주혼자)의 합의와 타당한 이혼사유가 필요했다. 이혼사유로는 칠거지악(七去之惡,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7가지 이유)이 대표적이었다. 이혼한 여성들이 수절(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 죽는 것)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로 여겨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배층에 한정된 것이었고, 노동력이 필요했던 피지배층에서는 여성의 재혼이 비일비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점차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에 정착하면서 이혼과 재혼을 규제하고 수절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장되었다. 이것이 심화되면서 여성의 재혼은 죄악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서류부가혼 사회에서 재혼 가정의 모습도 ‘전통적’ 재혼 가정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재혼 가정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전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가족 구성 안에서는 계모와 전처 자녀 간의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장화홍련전>이나 <콩쥐팥쥐> 같은 소설들이 창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류부가혼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갔기 때문에 전혀 다른 형태의 재혼 가정이 형성되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서로 다른 자녀들로 구성된 재혼 가정도 많았다. 고려 중기의 문신 이승장은 유복자(遺腹子,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로, 어려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그리고 이복동생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물론 계모와 전처 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 무관 기홍경은 2번 재혼하여 김숙자의 누이와 혼인한 뒤 죽었다. 그러자 기홍경의 장남인 기상렴이 아버지의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기홍경의 둘째 부인의 아들인 기상질이 셋째 부인인 김씨와 사통(私通, 간통과 유사한 의미이다) 하였다고 모함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기홍경의 자식들은 계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처의 자녀들은 계모를 ‘어머니’로 인식하지 않았다. 계모를 어머니로 인식했다면 모함하여 관에 고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에 성리학적 가족윤리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던 세종조차 계모의 삼년상을 치러주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장가가는 풍습이 시집가는 풍습으로 바뀌고, 성리학적 관념이 정착하자 계모를 어머니로 섬겨야 하는 당위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계모에게는 전처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돌봐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원만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위의 기상렴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혼인 풍습이 변해가는 과도기에 계모와 전처 자녀는 서로를 진정한 가족원으로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현실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강자인 계모가 약자인 전처 자녀들을 학대하고 구박하는 일이 잦았을 것이다. 전처의 자녀들은 계모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를 ‘어머니’로 인식하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학대를 당연시했을 개연성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계모형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17세기경 창작되어 점차 변형된 것으로 추정)은 이러한 계모 관념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준다.
한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 형태가 확산되면서 조상과 후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되었다. 현재 우리 가정에 있는 족보를 살펴보면 아마 대부분은 부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족보의 시조는 항상 남성이며, 그 후손들은 시조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족보 체계 안에서 여성은 그저 남성의 아내이자 딸 정도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략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계보를 인식하는 데 있어 부계와 비(非) 부계 간에 차이를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귀족 및 사대부들은 자신의 뿌리를 기록하기 위해 ‘팔고조도’를 작성했다. 18세기 사람 황유석이 작성한 팔고조도에는 총 8명의 고조부와 8명의 고조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앞에 ‘외(外)’ 자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황유석은 조상을 기록함에 있어서 친가와 외가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동시대에 친가와 외가를 구분한 사례도 있다. 이는 가문에 따라 부계적 계보 관념이 침투한 정도가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조상과 후손을 인식함에 있어서 부계와 비부계를 차별하지 않는 의식은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 성화보’에서도 잘 나타난다. 안동권씨 성화보에는 권중시라는 선조를 기점으로 하여 그의 자손들을 부계와 비부계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수록하고 있다. 그 결과 안동권씨 성화보에 권씨는 9%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성(他姓)이다. 또한 자녀를 수록함에 있어 성별에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했다. 이는 아들과 딸, 그리고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는 관념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7~18세기까지만 해도 계보를 인식함에 있어 부계와 비부계를 차별하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 당대인에게 있어 조상이란 나에게 피를 물려준 모든 사람이었고, 후손이란 나의 피를 물려받은 모든 사람이었다. 즉 혈연이 가장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동기(同氣) 이론’(조상과 후손이 ‘기’로 연결되어 있으며 기는 부계로 이어진다는 성리학 이론)이 양반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혼인 풍습이 바뀌자 조선 사회는 점차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가족의 형성은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이 주자학(성리학)적 생활양식과 관념을 정착시키기 위한 의도적 노력의 결과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유일한 학문으로 규정하고, 성리학의 연구와 확산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혼인 풍습 및 가족 관념은 중국과 매우 달랐기 때문에 단기간에 바꾸기 어려웠다. 그래서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인 혼인 풍습과 가족윤리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정착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가족형태와 관념은 우선 사대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점차 하위계급으로도 확산되었다. 이러한 확산 과정에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향반(鄕班)들도 큰 역할을 했지만, 양반을 모방하고자 하는 상민층의 '양반열'로 인해 전통적 가족형태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한편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형태와 성리학적 가족 윤리는 해방 이후 재강조되었다. 필자가 이전에 ‘국가 만들기 – 민족의 창조’에서도 지적했듯이, 국민국가의 창조 과정에서 국가는 큰 단위의 가족으로 개념화되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가족’ 안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아버지’로, 국민은 ‘자식’으로 표상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효(孝)’의 감정은 대통령에 대한 ‘충(忠)’의 감정으로 치환되었다. 이처럼 국민을 국가에 충성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가부장적 가족형태와 가족윤리는 초역사적인 ‘전통’이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인용
권순형, 「고려시대 서류부가혼 (壻留婦家婚)에 대한 연구」, <<이대사원>> Vol 30, 1997, pp.8~9
권순형, 「고려의 이혼과 재혼」, <<민속학연구>> Vol 6, 1999, pp.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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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三峯集> 권7, 婚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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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장묘지명>,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s://c11.kr/3ee0
김종직, <佔畢齋集> 「彝尊錄」 下 先公事業弟四
<世宗實錄> 권 64, 세종 1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