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만들기 2

민족의 탄생

by 루카스

4) 민족의 창조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위의 문장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0대 이상이라면 대강 외우고 있을 문장이다. 그렇다. 바로 1974년부터 2007년까지 사용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 전까지 이 맹세문을 암기하고 애국조회시간마다 암송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학생 중 ‘조국’과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국이 무엇인지, 민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나이도 되기 전에 이러한 개념들을 무의식적으로 습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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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다. 주로 북한 관련 뉴스나 TV 프로그램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어볼 수 있는데, 항상 북한 주민들을 우리 민족이라 부르고, 우리(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는 한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은 한 민족일까? 그렇다면 남한 사람들끼리는 한 민족이 맞을까? 그보다 우선적으로 민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위와 같은 질문들을 한 번쯤 해 봤을 가능성이 높다. 민족 개념에 대한 강조가 이전 세대에 비해 약해졌고, 민족 담론을 반박하는 여러 지식인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민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한다는 점에서 아직 기존의 민족 담론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한(韓) 민족’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한반도인 사이에는 지역에 따라 유의미한 정도의 문화적·언어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 민족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면, 이는 스스로 민족 담론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한민족’을 부정하더라도 그와는 다른 몇 개의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민족을 과학적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민족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민족은 ‘과학적’ 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혹은 연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민족을 정의한다는 것은 민족이 ‘보편적 진리나 법칙’ 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민족은 ‘보편적 진리나 법칙’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은 매우 가변적이고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역사학자 패트릭 J. 기어리(Patrick J.Geary)는 자신의 저서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에서 이러한 민족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는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최초로 탄생한 곳은 독일로,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패배한 시점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지식인들은 ‘문헌학’과 ‘민족 고고학’이라는 두 가지 무기를 바탕으로 민족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문헌학을 통해 해당 문헌에 쓰인 언어가 현재의 독일어와 같은 어족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그 과거가 ‘독일적’ 임을 주장했으며, 민족 고고학을 통해 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알려주는 유물을 찾고 그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려 했다.


그 결과 그들은 민족이 되기 위한 핵심 요소를 ‘과학적’으로 확립했다. 옛 과거의 독특한 문화, 언어, 영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에 도입되어 있는 민족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국어사전은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독일에서 뿌리내린 민족 역사학의 개념과 연구방법을 ‘민족이 되고자 하는 집단들’이 모방했기 때문이다. 기어리 교수는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창조되는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소수의 “개명한”학자들이 피지배 민족의 언어, 문화, 역사를 연구한다.


이러한 창조 과정은 한국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민족의 창조는 크게 두 번의 큰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시기는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된 시기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국적 위기감이 팽배했던 때였다. 이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같은 신문이나, <태극 학보>, <서북학회 월보> 같은 학술지를 통해 민족/국민 담론을 제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 역사 전기 소설이나 <<국가학>>, <<국가사상학>> 등 다양한 종류의 ‘교과서’들도 힘을 보탰다.


이러한 초기의 민족 담론은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에 의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박은식은 역사를 ‘국가정신’으로 보고 역사교육을 통해 국가정신, 즉 국혼(國魂)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망국의 상황에서, 국혼이 살아있으면 형체인 국가도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혼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박은식은 국혼의 구성요소로서 국교·국학·국어·국문·국사 등을 지목했는데, 이는 서양의 민족사학자들이 민족의 구성요소를 언어·종교·관습 등으로 본 것과 유사하다.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는데, 아(我) 중에서도 정신·사상 등을 진아(眞我) 혹은 대아(大我)로 보아 민족정신을 강조했다. 이렇게 조선 지식인들에 의해 창조되고 강조된 ‘민족’ 개념은 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애국자들에 의해 확산되었고, 이는 3.1 운동이나 광주학생 항일운동과 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image_2200038891535345285343.jpg?type=w773 백암 박은식


dancha.jpg?type=w773 단재 신채호



두 번째 시기는 해방 후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시기이다. 한반도는 독립은 했으나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진주하여 단독정부를 출범시키려 했다. 이에 민족주의자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민족의 통합을 주장했는데, 이론적 바탕이 된 것은 손진태 등 역사학자들이었다. 손진태는 일본에서 근대 역사학을 배워 이를 바탕으로 ‘신민족주의’를 주창하고 한국 고대사의 틀을 세웠다. 그는 한민족이 역사 이래 동일한 혈통·지역·문화·민족 투쟁·역사 생활 등을 공유해왔고 혼혈은 극소수이기 때문에 “민족사가 곧 국사”라 주장했다. 그는 또한 단일민족은 “분열을 원하지 않고 통일을 욕구한다 “고 하여 민족의식을 통일의식으로 발전시켰다.


손진태가 창조한 민족의 개념은 한국인에게 민족에 대한 모범 답안이 되었다. 비록 통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정치인과 학자들에 의해 수십 년간 확대 및 재생산되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에서 통일은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것이 되었다.


신민족주의를 정립한 남창 손진태


한편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남한 사람들’만을 한 민족이라 규정하는 사상도 등장했다. 이는 이승만이 창도한 ‘일민(一民) 주의’로 안호상(초대 문교부장관), 양우정(연합신문사 사장)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건국 당시 남한 정부는 ‘단독정권’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국내외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심지어 국가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남한 정부를, 언제든지 통일 국가를 위해 부정될 수 있는 ‘지역 정치체’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을 하나의 ‘민족국가’로 만드는 것은 이승만 정부에게 있어 ‘현실적’인 요구였다.


이들은 먼저 문화적·민속학적 속성보다 인종적 속성을 강조하여 민족을 ‘자연적’인 집단으로 규정하려 했다. ‘단일한 혈통’은 언어나 풍습에 비해 더욱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요소로 표상되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민족에 대한 인식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일반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용이한 개념이었다. 단일한 혈통으로 구성된 민족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묘사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을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실체로 믿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중을 철저히 ‘동원’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깊은 내면까지도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일민주의자들은 민족이 자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임을 강조했다. 양우정은 민족의 기원을 ‘한 가족’으로 보았고, 민족을 ‘가족의 연장’이라 하였다. 한편 안호상은 ‘겨레’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추상적 개념인 민족을 가족의 범위로 끌어내려 구체화하려는 시도였다. 대중으로 하여금 ‘한민족’이라고 하는 큰 가족의 구성원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게 하고, 그를 위해 자발적으로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혈연으로 이어진 민족을 가족으로 정의하는 것은, 북쪽의 경쟁자들(공산주의자)까지도 민족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했다. 민족은 ‘관념적’ 일 필요가 있었다. 안호상은 “民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 한다”라고 하여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만을 민족의 범위에 포함시키려 했다. 민족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였다. 한민족이 되려면 일민주의를 따라야 했고, 공산주의를 배격해야만 했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민족의 바깥으로 추방되고 헌법상의 권리를 빼앗길 수 있었다.



인용

패트릭 J.기어리 저, 이종경 역,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 2004, 지식의 풍경, pp.46~56
정선태, <근대계몽기 ‘국민’담론과 ‘문명국가의 상상’- 태국학보를 중심으로>, <<어문학논총>> 28, 2009, pp.63~64
배용일, <<박은식과 신채호 사상의 비교연구>>, 경인문화사, 2002, pp.106~111, 116~119
이종욱, <<민족인가, 국가인가?>>, 소나무, 2006, pp.112~117
임종명, 「一民主義와 대한민국의 근대민족국가화」,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4>>, 2005, pp.267~270, 272~274, 276~277, 279~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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