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형성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동네가 마음에 드는가? 그렇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교통체증? 성냥갑 아파트? 문화시설의 부족? 비싼 물가? 사실 필자도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 동네에서 19년을 살아서 정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참 바뀔 부분이 많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도시계획에 대해 자세히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떻게 해서 이러한 형태로 한국에 자리 잡았는가를 밝히려는 것이다.
도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해왔고, 각자의 정치·경제·문화적 풍토에 맞게 변화해왔다. 예컨대 서양에서는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고라’라고 하는 광장이 있어, 폴리스(도시국가)의 시민들은 그곳에서 토론하고 교류했다. 로마의 광장이었던 포럼(forum) 역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중세 유럽의 광장은 주로 교회나 시청의 앞에 설계되었다. 광장의 주위에는 여러 상업시설이 들어섰고, 그 외곽에는 거주시설이 빽빽이 들어섰다. 유럽 도시의 거주시설은 대부분 불결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광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광장과 같은 공공장소는 시민들에게 거래, 교류,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이곳은 절대왕권의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혁명적 사상들이 탄생하고 전파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유럽의 정치는 광장을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동양에서는 ‘길’이 광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동양의 도시들은 대체로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델로 했다. 장안성은 장방형으로 성곽을 두르고, 그 중앙에 궁성을 두었다. 궁성의 남쪽으로는 곧고 길게 뻗은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구역을 나누는 길이 나 있었다. 한양(서울)도 이러한 양식을 본 따 설계된 도시였다. 한양에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남쪽으로 길게 뻗은 육조(六曹)거리가 있었고, 그와 십자 형태로 교차하는 종로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특히 종로는 ‘운종가(雲從街)’라는 별칭에 걸맞게 언제나 인파가 운집하는 거리로, 한양의 명실상부한 중심 거리였다. 조선의 민중들은 이곳에서 생필품과 사치품을 구매하고 여러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기존 조선 민중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던 종로 일대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명동을 비롯한 남촌에 공간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대표적 도시 권역이었던 종로 일대와 대안문 앞 광장을 파괴하고 변용시킴으로써 한성의 장소성을 지우려 했다. 동시에 일본인 거주지에 인접한 지역에 선은전 광장을 건설하고, 경운궁 앞에 위치한 경성부청의 전면에 부청앞 광장을 건설하여 경성의 도시 권력을 이동시키려 했다. 이렇게 하여 경성부내 도심은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구역과 남촌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구역으로 크게 나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업 자본주의가 한국 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하자, 농촌의 농민들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도시들은 주로 자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 국가의 개발계획에 따라 성장했다. 군부독재정권은 국가발전을 기치로 내걸고, 기업과 손잡아 성장을 주도해나갔다. 수도권 공업지대와 남동권 공업지대, 내륙 공업지구를 중심으로 한반도는 거대한 산업도시의 회랑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성장의 과실(果實)은 모두 도시로 집중되었으며, 농촌의 주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되었다. 도시는 이들 노동자의 일터이자 거주지였는데, 정부는 이들을 위해 이른바 ‘주거 기계’라 할 수 있는 아파트를 대량으로 공급했다.
이러한 초기의 아파트들을 이른바 ‘시민아파트’라 했다. 그러나 시민아파트는 대부분 판자촌을 허물고 지었기 때문에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었고, 자연스레 수도 등 시설도 열악했다. 게다가 사람들의 기존 생활양식과도 맞지 않았고, 고층 아파트에서는 아이들의 추락사고도 빈번히 일어났다. 따라서 시민아파트는 자연스레 인기가 좋지 않았고, 1970년 와우아파트의 붕괴는 시민아파트 공급의 중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공급을 시작으로 정부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아파트들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들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중대형 아파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시설이나 안전과 같은 부분도 보완하였다. 또한 단지 주변에 학교, 쇼핑센터 등 인프라를 구축해 아파트의 인기가 급증했다. 이에 정부는 몇몇 민간 재벌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어 아파트를 대량으로 공급하도록 하고, 동시에 선분양제도와 분양가 상한제를 마련하여 입주자들이 높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는 건설사에도, 서민들에게도 매력적인 ‘상품’이 되어갔다. 집을 상품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은 여기서 등장했다.
아파트는 곧 ‘내가 산’상품이었기 때문에 입주자들은 그 공간을 사유화하려 했다. 한국의 아파트들은 대체로 ‘단지(團地)’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담이나 조경을 통해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한다. 따라서 방문객들은 오로지 지정된 정문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또한 신식 아파트 단지에는 입주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헬스장, 보육 시설, 독서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이렇게 폐쇄적인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의 성격이 상당히 짙다.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가 ‘커뮤니티의 장’으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부녀회나 노인정 같은 커뮤니티 장소는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아파트 입주자 간 안면을 트고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아파트는 단순히 주거를 위한 기계적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렇다면 아파트 이외의 도시 공간은 어떨까? 현대 한국의 도시들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를 비롯한 근대 건축가들의 도시계획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하나의 거주 기계(machine àhabiter)이다”라는 유명한 공식으로 거주 형태의 중요성과 역할을 정의했다. 그는 집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보았다. 그의 저술에서는 도심, 거리 등의 성격을 설명하는 수많은 기계 은유가 등장한다. 그의 기계 모델에 따르면 하나의 도시는 작고 자율적인 부분들로 이뤄지고, 이 부분은 더 큰 기계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큰 기계는 차별화된 기능과 움직임을 갖는다.
그는 도시가 순수 기하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속에서 질서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직각과 직선을 찬양했는데, 이는 인간에게 일종의 본능적인 수단이고 인간 사고의 높은 목적이라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유럽의 도시들은 이러한 직선과 직각의 우월성을 완전히 무시한, 즉 후진적인 도시들이었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그의 철학은, 도시 계획에서 건강과 위생에 대한 배려로 나타났다. 그는 햇빛과 녹지 공간의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는 최대한 거주 공간을 높게 지어 좁은 면적 당 최대한 많은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건물의 높이와 거리를 조절하여 누구나 햇빛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했다. 그의 목적은 ‘대기와 빛 속에 배치된’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땅 표면의 5%만 거주 공간으로 쓰고, 나머지 공간에는 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널찍한 도로와 공원이 들어서야 했다. 사실상 도시를 거대한 정원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빛나는 도시’계획이었다.
그는 도시의 기능을 ‘거주’, ‘노동’, ‘여가’, ‘교통 순환’의 네 가지로 보았고, 그 중 ‘거주’를 으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여가 활동과 그것을 실현하는 공간과 관련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가 활동을 위한 ‘집단적 삶’을 조직화하려 했는데, 이는 개인은 거주로 결합되며 집단은 여가로 결부된다는 그의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아파트와 같은 대형 공동 거주 공간이 오히려 집단적 삶을 형성하는 데 유리하다는 그의 생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그의 기능적이고 과학적인 도시계획은 개별 도시의 역사성과 서사를 무시한다는 치명적 단점을 갖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보편적 개인’의 표상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그 보편적 개인은 정작 삶의 방식이나 전통과는 무관한 추상적 개인이었다. 네덜란드의 건축가 콜하스는 이러한 도시를 ‘총칭적 도시(generic city)’, 즉 몰개성적인 도시라 비판했다. 이러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장소를 모두 없애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강남과 일산, 분당 등의 도시에서 그 도시의 역사성과 서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양산해내고 있는 ‘보급형 신도시’들은 대부분 이러한 르 코르뷔지에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도시를 업무지구·주거지구 등으로 나누는 것이나, 오래된 건물들을 헐고 반듯한 고층건물을 짓고 녹지를 만드는 재개발 방식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쾌적함을 강조한 덕분에 건축물의 고도 제한과 같은 지역지구제나 미관지구 등이 생겨났다. 도시의 구역을 용도별로 분류해놓고 그 사이를 널찍한 도로로 이어놓은 탓에 자동차는 시민들의 생활 필수품으로 등극했다. 금세 도로는 자동차로 꽉 차게 되었다. 도로를 넓힌 것이 오히려 교통 체증을 유발한 것이다. 주거지구의 대부분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로 채워졌다. 이러한 도시에서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그것의 근본을 이루는 인간이 담겨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