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국민 되기(학교-군대)
필자를 포함하여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30대 미만의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옛날에는 학교에서 ‘교련’이라는 과목을 배웠다고 한다. 교련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남학생은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여학생은 제식훈련과 구급법을 배웠다. 요즘 학생들이 들으면 정말 의아해할 일이다. 그런 건 군인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학생들은 군인이 아니고, 그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군대와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남학생들은 나중에 군대를 가야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여학생들은 왜 그런 교육을 받아야 했을까? 교련 과목을 시행하자고 한 사람들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결과로 한국 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군부정권 시기 한국의 의무교육 과정에는 교련 과목처럼 대놓고 군사와 관련된 교육뿐 아니라 군대 훈련소에서나 배울 법한 교육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규칙적인 일과, 체벌, 일기 쓰기, 애국조회, 국군장병에게 편지 쓰기 등 애국심을 고취하고 신체를 규율하는 교육들은 군대에서도 거의 그대로 행해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군대생활을 ‘고등학교의 연장’, ‘빡센(강도가 높은) 수련회’등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의 의무교육 과정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문제없이 ‘충실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군대 생활과 문화에 나름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한국의 의무교육이 학생들을 군인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해왔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학창 시절부터 군대와 관련된 교육을 받았던 것은 한국의 군사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에는 모든 국민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특히 남성의 경우 예외 없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제도를 ‘징병제’라 한다. 이러한 징병제라는 군사제도 하에서 모든 남성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입대하여 병영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군인은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는 그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철저히 세뇌시켜야 했다. 그들이 여러 훈련을 통해 충분히 통제될 수 있는 존재로 훈육되었을 때, 비로소 무기를 지급했다. 그러나 이미 성장한 상태에서 그러한 교육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미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 등이 거의 자리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대에 입대하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학창 시절부터 그들을 군인처럼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본래 징병제는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징병제는 시민들의 헌법적 ‘권리’로서 받아들여졌다. 루소는 “모든 병사는 시민이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병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헌법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병역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자, 인민 평등의 상징이었다. 한편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은 군대를 통해 일반 사회를 군사화하고 통제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사회 영역 깊숙이까지 개입하려 했다. 프로이센의 이러한 군사대국화 정책은 군사력을 단기간에 상승시켜 프로이센을 기존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 등과 대등한 실력을 갖출 수 있게 했다.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프랑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한편 막부를 몰아내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일본의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해 사무라이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무력을 회수하고 ‘국민군대’를 창설하려 했다. 1870년 11월에는 징병 규칙이 제정되었고, 1873년 정월에는 징병령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신분의 차별 없이 만 20세가 된 남자를 의무 복무하게 하는 새로운 군제가 확립되었다.
일본이 추구했던 징병제의 형태는 프로이센식의 징병제로, 통수권자인 천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국주의 노선은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사절단은 1871년 일본을 출발해 미국과 유럽 각지를 순방하고 1873년 귀국하여 일본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는 프로이센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전해진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결과로 채택된 것이었다. 군사대국화를 달성하기 위해선 그 수단으로 징병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사무라이 계층과 평민층 모두에서 징병제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다. 사무라이 계층은 자신들의 ‘특권’이라 여겼던 무력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고, 평민들은 한창 일할 시기에 군대에 끌려가게 되면서 조세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생각했다.(일본의 농민들은 이를 ‘혈세’라고 표현했다) 아직까지 일본인들은 징병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일본 지배층은 교육을 통해 민중을 개조하여 군인으로 동원하기에 적합한 학생-군인을 양성하려 했다. 일본 정부는 소학교-중학교로 이어지는 의무교육 기간을 설정하고 서서히 취학률을 높여가는 한편, 국가=천황을 골자로 하는 애국주의·황도 주의 교육을 강화했다. 이는 일본 교육이 국민 개개인의 역량을 신장시켜 국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에게 충성하는 신민 육성이라는 시대착오적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육 방향은 1890년에 발표된 ‘교육칙어’를 통해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병(사)식 체조 도입, 어진영(천황 부부의 사진) 배부, 기원절(일본의 건국기념일) 및 천장절(천황의 생일) 등 국가기념일 행사 등을 통해 학생들의 일상으로 침투했다.
이렇게 일본에서 ‘국가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학생-군인 만들기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그러니까 식민지 조선은 징병제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군에 입대할 수 있는 권리는 충분히 ‘일본화’된 사람에게만 부여되었으며, 그 외의 조선인은 함부로 군에 입대할 수 없었다. 조선인에게 입대를 허용하게 되면 그들에게 참정권과 같은 다른 권리들까지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병사의 수요가 급증하자, 일본은 조선인을 병력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에게 행해지고 있던 황민화 교육이 조선인 학교에도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이 교육은 조선인의 습속을 일본식으로 개조하는 것으로,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일본의 ‘전통’이라고 선전하며(사실 그런 전통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인의 입대를 유도했다. 일본은 교육을 통해 조선인을 규율에 따라 움직이며,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천황에게 충성하는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려 했다.
이러한 황민화 교육의 실상은 1930년대 조선인 학생들의 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1938년 지방에서 경성으로 유학 온 경기중학교 1학년 학생의 일기장에는 특기할 만한 세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는, 일기장에 황민화 교육에 필요한 핵심 내용들이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역대 천황 일람표, 황국신민서사, 충성스러운 위인들 등의 내용들을 반복적으로 접하고 암기함으로써, 학생들은 천황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관념을 학습할 수 있었다. 둘째는, 모든 일기가 일본어로만 쓰여 있다는 것이다. 일본어로 일기 쓰기를 강제했던 것은, 피지배인인 조선인에게 지배 민족의 언어인 일본어를 깊숙이 내면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조선인은 무의식적으로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습득하고, 스스로 일본인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담당 교사가 학생들의 일기를 정기적으로 검열했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일기를 검열하여 학생들의 생각을 통제하고 교정할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의 일기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유사 군대식 병사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교련 과목이 매우 강조되었고, 육군 기념일에는 신궁 참배나 학생들의 시내 행진 등이 거행되었으며, 위문편지 쓰기나 교사 출정 환송식 등이 실시되었다. 학생들은 항상 군대식 생활과 관념에 익숙하였으며, 국가와 천황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노출되어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교정하고 단련시켜 장차 전쟁에 투입될 일본군으로 양성하는 것, 그것이 황민화 교육의 목적이었다.
한국의 징병제는 한국전쟁에 대한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다시금 부활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상시 충분한 병력을 운용해야 했고, 이는 징병제의 부활로 이어졌다. 그 틀은 일제의 것을 많이 모방했다. 초기에는 완벽한 호적이 만들어지지 않아 징병제를 온전히 시행하기 어려웠고, 병역 미필자의 수도 상당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군부정권이 수립되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병역 기피자 단속’ 정책을 펼쳤다. 병무청을 신설하여 징집 업무를 일원화했고, 주민등록제도를 실시해 국민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즉각적으로 효과를 보았는데, 1968년 이후 병역회피자의 수가 급감한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주민등록제도 확립은 현역병 징집 및 예비군 소집을 위한 신상자료 확보 작업과 철저히 보조를 맞춰 진행되었다. 병역 기피자는 ‘비(非) 국민’으로 낙인찍혔으며, 범죄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징집제의 완전한 시행은 한국 남성들을 모두 ‘군인화’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들은 학교에서 애국심을 기르고 기초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입대하여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병영 문화를 체득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그러한 병영 문화를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충성스럽고 성실한 국민’들이었으며, 국가를 위해 충성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여성은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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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훈, <<일본사강의>>, 히스토리메이커, 2017, p.346
이권희, <메이지기(明治期) 국민교육에 관한 통시적 고찰 - 교육사상의 변용과정을 중심으로>, <<日語日文學硏究>> Vol 91, 2014, pp.467~475
강유인화, <식민지 조선과 병역 의무의 정치학 - 일제의 징병제 시행과 ‘국민됨’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Vol 109, 2016, pp.83~90
박철희, <일제강점기 중등학생의 일기를 통해 본 식민교육>, <<교육사회학연구>> Vol 26, 2016, pp.106~108, 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