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시간의 등장
조선 후기까지도 한반도인들은 그들만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가 타임머신을 만들어 타고 150년 전인 1868년도의 조선으로 간다고 생각해보자. 낯설고도 뭔가 친숙한 풍경을 마주한 우리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물을 것이다. “지금이 몇 년도인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질문을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들이 설사 알려준다 하더라도 “무진년이오” 정도로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함을 느낀 여러분은 조금 더 똑똑해 보이는 갓을 쓴 선비에게 다가가 질문한다. “올해가 몇 년도죠?”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여러분은 양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함부로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그의 하인에게 맞았을 것이지만, 이는 고려하지 않도록 하자. 그 양반은 조금 더 배운 사람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청국 동치(同治, 청 목종의 연호) 7년이자, 조선의 대군주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다섯째 되는 해요.” 이렇게 말해준다면 이 선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상당히 고지식했던 일부 선비들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崇禎帝)의 연호인 ‘숭정’을 가지고 연도를 계산했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이미 25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여러분이 간지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거나, 청나라 동치제·조선 고종·명나라 숭정제의 즉위연도를 알고 있었다면 간신히 연도를 계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지금이 몇 시인지 물어봤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나은 답을 주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근대적 시간관념이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해가 뜨면 일어나서 아침 먹고 일하고, 해가 질 때 집으로 돌아와 저녁 먹고 자면 그만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언제 비가 올지,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등이었다. 농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계를 가진 사람들은 왕실과 고관대작, 그리고 서구 문물에 관심 있던 일부 기술자들 및 학자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전통적 시간관념은 전 세계적으로 발 빠르게 진행되던 근대화의 추세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 역시 이러한 근대화의 파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곳곳에서 이양선(서양의 함선)이 출몰해 통상을 요구해왔고, 막 근대화하기 시작한 청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며,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로의 변모에 성공한 일본도 자신들의 세를 확장하기 위한 기지로 조선을 낙점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그들을 따라 근대화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근대화의 핵심은 모든 신민을 ‘국민화’하고 그들을 국가의 목적에 따라 ‘동원’하는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국가가 생존하는 방법은 남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가진 인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국민들로 하여금 정해진 시간에 따라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이게 하려면 우선 시간, 정확히 말해서 근대적 시간의 개념을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심어야 했다. 근대적 시간 개념을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간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건이나 영역들에 대해 단일한 기준 내지 척도로 적용하는 능력과 사고방식, 태도와 습속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인 좌표계 안에서 통합하여 파악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날짜 및 시간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건들을 하나의 시간표 위에 배열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근대적 시간 개념을 수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근대적 시간이 작동하는 세계 속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단순한 교육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을 시간 속에 가둬야 했다. 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매일 그날의 사건이 실린 신문을 읽고, 시간에 맞추어 기차를 타고, 곳곳에 걸린 시계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인지하게 하는 등의 것들이었다.
독립신문의 「잡보」는 그날 일어난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을 모아 놓은 란(欄)이었다. 가령 1897년 1월 9일 자 잡보에는 한국에 파견할 일본 공사가 새로 선임되었다는 사건, 러시아 사관이 경운궁 순찰을 돌다 제대로 보초를 서지 않은 자들을 문책한 사건, 각부 대신들이 민비의 장례와 관련된 회의를 했다는 사건, 쌀장사를 하는 두 사람이 남대문에 사는 두 노인을 보살펴주었다는 사건, 용인에서 도둑이 들면 목을 찔러 죽이겠다던 사람이 도둑에게 목이 찔려 죽은 사건, 삼청동 모씨의 집에서 잡박계를 한다는 소문 등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6건의 사건들은 서로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1897년 1월 9일’이라는 시간을 매개로 한 카테고리에 묶여 있다. 시간이 사건들을 파악하는 하나의 척도가 된 것이다. 이 신문을 읽는 전국의 독자들은 그들과 멀리 떨어진 사건들을 동시에 공유함으로써 시간이라는 점 속에 스스로를 대응시킬 수 있게 된다.
또한 신문은 매일 발간되기 때문에 그곳에 실린 사건들은 ‘오늘’이라는 개념 밑에 통합된다. 개개의 사건들은 모두 ‘오늘’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날 일들이었다. 신문에서는 ‘오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신문에 표기된 날짜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가령 2018년 4월 3일 신문에서, “오늘 xx시에 서울의 xx호텔에서 연예인 xxx씨가 기자회견을 가졌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2018년 4월 3일’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이는 이미 근대적 시간성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는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전근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근대적 시간 표현을 학습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시간의 흐름을 사건들과 대응시키는 훈련이기도 했다.
한편 신문에 실린 기차 시간표, 우체 시간표 등과 이 시간을 철저히 지켜 출발하는 기차와 우체부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주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1896년 4월 7일)부터 세 개의 표를 별다른 차이 없이 계속 게재했다. 이들은 주로 물가표와 제물표 운선 시간표, 그리고 또 하나는 한성 내외 지역의 우체 시간표였다. 운선 시간표와 우체 시간표는 양력과 시계적인 시간의 사용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그 시간표를 따라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근대적인 시간관념에 익숙해져 갔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되어갔다. 서양에서 근대적 시간관념의 발달은 공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장의 기계가 시계에 맞추어 돌아가고, 인간의 노동이 기계에 따라 맞춰지면서, 노동은 시간 단위로 분할되었다. 노동자들은 시간에 맞추어 출근하고 퇴근해야 했으며, 조금이라도 지각한 노동자에게는 그만큼의 임금이 차감되었다. 나태하고 게으른 것은 죄악시되었으며, ‘시간은 곧 돈’이라는 관념이 사람들의 머리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자연스럽게 근대적 시관 관념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필요로 인해 강요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통한 시간관념이 먼저 자리 잡았고 그 이후에 학교, 공장, 병원, 기차역 등으로 확산되었다.
대한제국기에 이르면 외국인들이 세운 영어 학교를 중심으로 시간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등교 시간을 정해놓고 그것을 어길 경우 벌금을 물림으로써 아이들에게 시간 엄수의 중요성을 가르치려 했다. 독립신문에서는 이것이 매우 공부에 유익하리라 논평하며 독자들에게 시간 엄수를 권유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식 근대 교육이 도입되어 더 철저한 방식으로 시간 교육이 이루어졌다. 학교에서는 점차적으로 규율로서의 시간이 부과되고 강화되었다. 학생들은 시간표에 따라 생활하고 수업을 받았으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육은 더욱 심화되었다. 학기의 끝에는 시험을 보고 그 결과는 등급화되었다. 이 등급은 학생들에게 상위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학생들은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학생들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
학교 내 아동들의 행동도 규율체제에 의해 규제되기 시작하였다. 집합, 착석, 기도 등 아동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순서와 소요시간이 정해졌다. 아이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신체의 행동을 시간에 합치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아이들은 8시 45분이 되면 자동적으로 집합했고, 8시 50분이 되면 자동적으로 기립한 후 선서나 기도를 했으며, 8시 55분이 되면 착석하고 책을 폈다. 권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비효율적 행동’이 아이들의 시간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런 행동들은 모두 체벌 등으로 규제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시간은 ‘효율적 행동’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근대 권력은 규율을 통해 신체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여 더 우수한 학생, 더 근면한 노동자, 탁월한 군인들을 생산하고자 했다. 이러한 권력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이 목표한 바를 스스로 ‘내면화’하도록 은근히 유도했다. 여기에는 인간을 '필요한 인간'과 '불필요한 인간'으로 나누는 과정도 포함되었다. 사회는 규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불필요한 인간'으로 낙인찍었고, 그들에게 벌금, 폭행, 처벌 등의 '응징'을 가했다. 반면 규율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는 보너스와 사회적 찬사가 따라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반도인들은 서서히 동일하고 균질한 시간과 규율체계로 편입되었다.
인용
1. 김미화, 「근대 이행기 동아시아의 紀年法」, <<사회와 역사>> 110, 2016, p.185
2. 박태호, 「독립신문과 시간-기계」, <<사회와 역사>> 64, 2003, p.168, 170, 174, 189
3. 구수경, 「근대적 시간규율의 도입과정과 그 의미」, <<교육사회학연구>> 17, 2007, pp.4~5, 15,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