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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영 Oct 29. 2018

예, 나는 리코더 연주자입니다. 6

헤르메스와 리코더

헤르메스와 리코더.

언듯 보기에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헤르메스는 음악과도 연관이 깊은 신이다. 헤르메스(Hermes), 혹은 머큐리(Mercury), 메르쿠리우스(Mercurius)라 불리는 이 신은 올림포스 12 신중 하나이다. 그리스식으로 헤르메스이며 영어식으로는 머큐리, 로마식 이름은 메르쿠리우스이다. 헤르메스는 -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이 그렇지만- 범상치 않은 출생 과정을 가지고 있다. 정확히는 출생 후 그의 행보가  그렇다. 제우스와 마이아(아틀라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제우스가 바람피워 낳은 자식들 중 유일하게 헤라의 미움을 받지 않고 오히려 사이가 돈독한 신이다.  이는 헤르메스가 가진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헤르메스는 헤라의 눈을 피해 마이아가 동굴에서 낳은 아이다.  그런데 방금 막 태어난 아기가 동굴을 나와 아폴론의 소떼를 훔친다.( 훔친 소떼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소를 기가 막히게 잘 훔쳐서  아폴론은 누가 자신의 소를 훔쳤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가까스로 소를 훔친 자가 헤르메스인 것을 알게 된 아폴론은 분노하여  제우스에게 고소한다.  헤르메스를 제우스에게 끌고 가는 와중에  아기 헤르메스는 소 해골의 두 뿔 사이를 내장으로 묶어 하프를 만든다. (거북이 등껍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으로부터 소리가 나고 음악이 만들어 지자 신기했던 아폴론은 이 악기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흔쾌히 악기를 주마고 헤르메스는 말하며 어떻게 하면 연주할 수 있는지도 친절히 가르쳐 준다.  그 짧은 시간에 악기 하나를 뚝딱 만들고 연주법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최초의 그리스 하프인 리라(Lyre)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제우스의 재판정에 도착한 아폴로는 제우스에게 헤르메스를 고발하며 중형을 내려달라고 한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아폴로가 소에 대한 대가를 이미 받았다며 하프를 가리킨다. 즉,  소를 훔친 것이 아니라 하프와 맞바꾼 것이라고 자신을 변론한다. 이에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형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억울했던  아폴론은 그렇다면 음악의 수호신이라도 자기가 하겠다고 주장하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헤르메스는 하프 말고 갈대 피리도 발명했는데,  이번에도 아폴론은 이 악기가 마음에 들어 황금 지팡이와 교환하자고 한다. 역시 헤르메스는 큰 미련 없이 악기를 황금 지팡이와 교환한다.(이 대목에서는 아폴론이 음악의 신 자리에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갈대로 만든 피리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황금 지팡이와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는 악기를 순식간에 만들어내거나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잘 넘기는 등 지략이 넘치는 신이다.  제우스는 그런 헤르메스를 아껴 자신의 전령이 되게 한다.  유일하게  헤라의 질투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헤르메스의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아들을 잘 둔 덕에 헤르메스의 어머니인 마이아도 덩달아 헤라의 미움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주신 제우스,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등 올림포스의 신들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하나 이상의 별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헤르메스처럼 복잡하고 많은 신격을 지닌 신은 별로 없다.  제우스의 전령,  상업의 신, 도둑의 신, 발명의 신, 목축의 신, 여행자들의 수호신, 죽은 자들을 인도하는 신, 다산의 신 등등…(여기에 음악의 신도 하나 추가될 뻔했으나 아폴론에게 넘겨 버렸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상업의 신이기도 하지만 도둑의 신이라니 얼마나 절묘한가. 또한 다산의 신 타이틀까지 쥐고 있으니 참 재미있다.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헤르메스의 어원은  '돌더미에서 유래된 자'인데 이 많은 신격은 이 어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마을 입구나 길가에 경계를 표시하는 '헤르만(Herme)'라는 네모난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헤르메스는 이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이 될 수 있었고, 신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 경계를 넘나들며 거기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장 밥티스트 피갈 [샌달을 조이는 헤르메스], 루브르 박물관

이렇게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신이지만 기본적으로 헤르메스는 아폴론 같은 신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발명한 악기를 협상 도구로 줘 버리거나 음악의 신이란 타이틀도 그냥 넘기는 등 권위를 세우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고대에서는 헤르메스가 인간에게 친숙한 신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제우스에게는 번개가 있듯이 헤르메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몇 개의 상징물이 있는데  날개 달린 모자 페타 소스, 날개 달린 샌들, 케리 케이온이라 불리는 전령의 지팡이가 그것이다.  헤르메스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에서 이 세 가지는 작품 속 인물이 헤르메스임을 나타낸다. 아래 그림은 비너스와 헤르메스, 그리고 에로스가 마치 단란한 가족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헤르메스의 상징인 페타 소스, 샌들, 지팡이가 모두 나타난다.

니콜라 샤프롱 [비너스, 헤르메스와 에로스],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네이버 헤르메스와 비너스, 에로스와의 단란한 한때.

헤르메스는 지략, 특히 계략이  뛰어나며 신들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맘껏 넘나들수 있는 신이다. 때문에 제우스가 자신의 전령으로 헤르메스를  곧잘 쓰곤 했는데( 주로 제우스가 저지른 일 뒤처리 담당이었다.), 일을 잘했기 때문에 제우스가 매우 좋아했을 것이다. 아르고스의 이야기도  제우스가 저지른 일을 헤르메스가 수습하는 이야기이다.  제우스가  이오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낌새를 눈치챈 헤라가 제우스에게 찾아간다.  그러나 역시 만만치 않은 제우스는 이오를 흰 소로 변신시켜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헤라는 제우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 흰 소가 그냥 소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백 개의 눈이 달린 아르고스에게 소를 감시하게 한다. 이오를 소로 변하게 했지만 헤라가 쉽게 물러서지 않고 감시까지 붙이니 제우스는 결국 헤르메스를 부른다.  이오를 아르고스의 감시에서 풀어주라고 명령한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에 헤르메스는 양치기로 위장하여 아르고스에게 접근한다. 이때 피리를 사용하여 경계심 강한 아르고스에게 다가간다. 아름다운 피리 소리에 아르고스는 양치기로 변장한 헤르메스에게  계속 피리를 불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경계심이 풀린 아르고스는 결국 백 개의 눈을 다 감고 잠이 들고 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헤르메스는 숨겨둔 검으로 아르고스의 목을 친다. 이오는 풀려나고 이에 헤라는 격분한다. 하지만 제우스가 맡긴 일은  언제나 성공적으로 해온 헤르메스가 아니던가. 헤르메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죽은 아르고스의 머리를 헤라에게 선물하고 헤라는 아르고스의 머리에서 백 개의 눈을 떼어내 자신의 공작의 날개에 달았다. 이로써 아르고스는 공작의 날개에 달려 다시 살아나게 된다. 이로써 제우스도 행복하고 이오도 풀려나 행복하고, 헤라도 공작 날개에 멋진 장식을 달아 만족하고 아르고스도 (비록 눈뿐이지만) 부활하여  모두가 행복한(?) 평화로운 결말이 맺어진다. 헤라는 자신의 공작의 날개를 아르고스의 눈으로 장식할 수 있게 해 준 헤르메스와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다. 제우스를 도운 헤르메스에게도 손해는 아닌 것이다.

프랑수아 베르디에 그림, 제우스에 의해 소로 변한 요정 이오를 구출하기 위해 목동 아르고스르 잠재우는 헤르메스, 프랑스박물관연합(RMN)

위 그림은 이 헤르메스와 아르고스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으로, 이제 막 잠이 든 아르고스의 머리를 자르기 직전의 헤르메스를 묘사하고 있다.  아르고스의 머리는 떨어지기 직전이고, 실행 직전의 헤르메스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악기는 바로 리코더이다. 그의 다른 손은 검을 쥐고 있다. 매우 긴장감 넘치는 순간이다. (다음 장면이 있다면 아르고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긴박감 넘치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리코더의 모습도 중앙에 잘 보이게 배치해 놓았다.  비록 이 그림은 헤르메스가 리코더를 연주하는 장면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아르고스가 어떻게 해서든지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허사가 돼버린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헤르메스가 연주한 리코더가 경계심 많은 아르고스를 단번에 무너뜨린 것이다.

그림 확대.

 헤르메스가 꼭 쥐고 있는 리코더를 보자. 취구가 부리 형태이며 라비움도 살짝 보인다. 크게 윗관- 중간관- 아랫관의 3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중간관에 구멍도 보인다. 구멍의 위치가 조금 위쪽으로 그려져 있고 마지막 7번째 구멍은 아랫관이 살짝 돌려져 있는 탓에 안 보이지만 전형적인 바로크 리코더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취구의 각도가 돌아가 있어서 정면을 향한 라비움과 조화가 안 맞는다. 취구가 라비움과 일직선이 되려면 정면을 향해야 하는데 이 그림에선 취구의 옆모습을 그려놓았다.  어쩌면 화가는 리코더의 특징을 강조하고 싶어서 일부러 취구의 각도를 틀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리 모양의 취구는 바로크 리코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취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려면 아무래도 정면보다는 측면이 더 부리 모양을 강조할 수 있다. 라비움 또한 리코더를 식별하는 큰 특징 중 하나인데,  그려진 취구의 각도를 따르려면  라비움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돌려 그려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라비움 역시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예상해보자면  화가는 리코더의 형태와 특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이 악기가  리코더임을 잘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을 수도 있다. 아니라면, 흠... 악기를 다시 그려주었으면(?)한다. 그렇다면 왜 화가는 이 신화에서 헤르메스가 분 피리를 리코더로 묘사했을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프랑수아 베르디에(Francois Verdier)인데, 1651년에 태어나 1730년에 죽은 프랑스 화가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1718년 그려진 것이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대표적인 피리가 바로 리코더였다. 피리는 한국식 명칭이고 서양식 명칭은 플루트(Flute)이다.  곧 피리는 플루트인데, 화가가 그림을 그린 1718년의 프랑스에서는 플루트라고 하면 가로로 부는 플루트 대신 이 세로로 부는 리코더를 떠올렸다. 이때쯤이 유럽에서는 리코더의 인기가 절정이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연히 화가는 이 신화에서 헤르메스가 연주한 피리-플루트를 리코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림에서 헤르메스의 왼쪽 어깨와 상체에 비치는 빛은 그대로 리코더를 향해 흐르고 있어 왼편의 아르고스와 대비되어 강조된다. 막 잠이 든 아르고스는 그림자가 비쳐 어둡게 처리된 반면 헤르메스와 그가 쥐고 있는 리코더는 밝게  묘사되어있다. 이런 효과는 리코더를 부각하고 이 악기가 가진 마법 같은 소리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소로 변한 이오는 온몸에 힘을 뻣뻣이 주고 긴장한 눈으로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고, 헤르메스가 왼손에 쥐고 있는 칼끝 또한 빛을 받아 번쩍인다. 곧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것이다.

 헤르메스의 피리를 묘사한 그림의 악기는 시대와 지역, 그리고 상황에 따라 여러 종류이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리코더로 많이 묘사되었다.

바로크 리코더를 모델로 한 현대 바로크식 리코더. 취구와 라비움, 7개의 구멍이 보인다.(뒷면에도 엄지 구멍이 있다.)


다음 그림을 보자.

요한 카를 로트 그림, 아르고스에게 피리를 부는 헤르메스,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이 그림은 바로 헤르메스가 피리를 불어 아르고스의 경계심을 푸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옆의 흰 소는 말할 것도 없이 이오가 변한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 헤르메스가 부는 피리 소리에 넋이 나간 아르고스를 볼 수 있다.  옆의 변신한 이오조차도 아름다운 리코더 소리에 깊이 빠져있는 듯 보인다. 이 마법 같은 순간을 표현한 그림에서 헤르메스가 들고 있는 악기를 보자.  처음 그림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악기가 있다. 이 악기도 마찬가지로 리코더이다. 그런데 왜, 위 그림의 리코더보다 낯설까? 그 이유는 이 그림의 리코더가 초기 바로크 시대의(혹은 르네상스 시대) 리코더여서 그렇다. 리코더는 크게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리코더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리코더는 르네상스나 초기 바로크 시대의 리코더로 볼 수 있겠다. 리코더는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에는 콘조트 악기로,  바로크 시대에는 독주용 악기로  사랑받았다. 위에서 얘기했듯 18세기 초까지 인기 있던 이 악기는 1720년대를 기점으로 그 인기가 점점 사그라들고 리코더의 자리를 가로 플루트에 내주게 되었다. 그 이후 고전과 낭만시대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연주되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부활한다.(물론 그 사이에 조금 다른 형태로 존재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한 리코더는 아널드 돌매치에 의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리코더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돌매치가 개량한 리코더는 바로크 리코더를 모델로 했다. 그래서 앞의 그림의 리코더는 친근하지만 이 그림의 리코더는 낯선 것이다.

 

카라바조 그림, 류트를 연주하는 사람.

위의 그림은 카라바조의 류트 연주자를 묘사한 그림이다. 류트의 묘사도 아름답지만, 화면 바로 앞에 놓인 악기도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듯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이 리코더는  르네상스 리코더이다. 바로 전 그림보다 명확하게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크 리코더보다 조금 더 뭉툭하게 생긴 취구와 정밀하게 묘사된 라비움이 보인다. 그리고 앞에는 8개의 구멍이 있다.(마지막 7번째 구멍은 이 시대에는 그림과 같이 더블 홀이었다.) 그리고 취구에서 끝으로 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던  원통형 관이 끝부분에서 살짝 벌어져있다. 바로크 리코더가 보통 3 부분으로 나누인 것에 반해 르네상스 리코더는 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리코더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고, 각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된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그림을 보자.

안드레아 로카델리 그림, 헤르메스와 아르고스, 18세기 초반

여기서 묘사된 피리는 가로 플루트, 즉 트라베소이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8세기로  위에서 이 시기가 리코더가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또한 이때가 리코더에게는 마지막 봄날이었다. 리코더의 인기는 여전했지만, 한편에서는 가로 플루트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서양 피리계의 신흥강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는 자크 마르탱 오트테르(Jacques Martin Hotteterre, 1674 - 1763)와  같은 가로 플루트 연주자(연주자이자 작곡가, 악기 제작자였고, 악기 교본의 저자이다)의  훌륭한 연주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이 그림의 화가는 그런 가로 플루트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림 주문자의 취향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그림을 통해서도 당시 사람들이 악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 헤르메스와 아르고스의 신화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많은 악기 중에 피리를 등장시켜 아르고스를 잠들게 한 이야기는 관악기가 가진 소리의 힘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관악기 소리가 졸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때로는 졸리기도 하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깜박 잠이 드는 때도 있지 않는가...) 이 세상에는 악기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성경에서는 유발이 리라와 관악기 연주자들의 아버지라고 묘사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폴론이 키타라를 발명했다고 하고(키타라는 리라와 구조가 비슷한 악기이다.),  이집트인들은 토트 신이 리라를 발명했다고 한다. 또 아울로스(고대 그리스 관악기. 갈대를 뜻한다.)는 디오니소스의 악기이다. 그런데 헤르메스와 관련된 신화에서는 헤르메스가 갈대 피리와 리라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마치 서로 자기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다. 어찌 됐든  이 이야기들은 그 악기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중세 독일의 하멜른에는 우리가 잘 아는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피리가 중세 리코더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관악기임에는 틀림없다. 이 이야기에서는 모든 쥐떼들이 피리소리에 이끌려 그 소리를 따라간다. 쥐떼들을 처리한 남자에게 시장이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피리소리로 아이들을 끌어내어 아이들과 함께 사라진다. 이 전설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겠으나, 이 또한 피리가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르고스가 그랬듯, 피리 소리는 사람, 심지어는 동물의 감정까지 움직이게 하며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을 잘 아는 헤르메스는 아르고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이 악기를 사용했다.  헤르메스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리라(하프)와 갈대 피리의 발명자다. 리코더는 흔히  20세기 이후 만들어진 플라스틱 악기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고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악기이다.(물론 그 사이에 수많은 이름을 가졌고 형태에도 변화가 있었다.) 헤르메스가 만들었다는 갈대 피리가 리코더의 조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헤르메스와 리코더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상상은 리코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상상해보라. 저 멀리서 들려오는 헤르메스의 마법 같은 리코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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