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닌 것 없는

<나 혼자 본다> 22. 정현: 그의 겹쳐진 순간들

by per se

PKM

20251022- 20251213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휴대폰에 기억을 두게 되면서 그 증상은 더 심해졌습니다. 한 때 사랑했던 이의 얼굴도 가물하고, 만날 수 없게 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친구의 얼굴도 어렴풋하고 이름조차 헷갈립니다. 풍화된 기억. 이 앞에서 망연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푸념이 자꾸 느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민망하다면서 멈추지 못하고 있지만), 예민한 편이라 내 몸에 대한 감각도 놓치지 못하고 걱정이 심한 편인지라 그런 내 모습도 자꾸 파고들어 보게 됩니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대부분 ‘누구나 그렇다’는 말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지만, 돌아서 오롯이 나 혼자 나를 바라볼 때면 언제 그런 공감대를 가졌냐는 듯이 공허한 생각이 듭니다.


어렴풋한 것은 스쳐간 사람들의 얼굴만이 아닙니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을 조금 듣기 좋게 하는 말이 살아온 세월은 반드시 얼굴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일 텐데, 점점 굴곡져 가는 내 얼굴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보게 되지만 별 것 없는 것 같습니다. 좀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이제는 이게 누구의 얼굴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노화를 느낀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어떤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살아오면서 이런 얼굴을 갖게 되었나 그간의 시간이 아득해진다는 말입니다. 또 앞으로 내 얼굴에 새겨질 시간이 어떤 모습일지 여전히 추측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점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편안하지만은 않고, 가끔은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만든 정현 작가는 용감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1년 전인가 2년 전인가, 성북구립 미술관에서 그의 전시가 있을 때 그가 만든 수없이 얼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나온 것이 기억납니다. 생김이 모아이 조각상처럼 선이 굵은 얼굴도 있고, 분명 무겁고 단단한 재질인데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얼굴도 있었습니다. 그 많은 얼굴들에 내 시선이 가 닿아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반성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나와 전혀 다른 그 얼굴들이 마치 내 거울인 것처럼, 한 때 웃었고 울었으며 괴로웠고 편안했던 인생의 불특정 시점들이 스쳐갔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발견하지 못한 건 ‘아이’였습니다. 한 번쯤 원치 않는, 예기치 못한 변곡점을 반드시 거쳤을 수많은 어른의 얼굴들 사이에서 저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KakaoTalk_20251124_150630446.jpg PKM 본관에 전시된 정현 작가의 작품들.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 군상 그 자체다.

그런 그의 개인전을, 2025년 끝자락에 삼청동 PKM에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은행잎을 무겁게 달고 늘어선 나무 사이로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저마다의 멋을 뽐내며 인증샷을 찍고 있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걷다가, 저 고요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조각상이 가득한 미술관에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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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재미가 있는 조각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 스타일을 두루 비교하며 볼 수 있는 드로잉 작품이 많다.

그의 작품들에는 거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형태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 자체라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설적이지만 추상적이라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어서, 많은 질문을 품어보게 됩니다. 얼핏 보면 재료를 가져다 얼마 다듬지 않은 것도 같고, 혹은 매우 많이 가공한 듯도 한 상반된 느낌을 줍니다. 거의 원형에 가까운 느낌일 듯한 작품들도 있었는데,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추상일수록 캡션이나 제목에라도 의지해 해석하지 않으면 뜻을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작품들이 많은데 반해, 정현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단순하지만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다양한 각도에서 보며 걸음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모습을 음미하는 재미가 오래 남습니다. 작품이 가진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면면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합니다.


KakaoTalk_20251124_150630446_16.jpg 별관 야외 정원에 전시된 알루미늄 작품. 수표교 교각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작품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정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갤러리 별관 정원에 설치된 조각은 위에 얹어진 돌과 아래의 기둥이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보입니다. 기둥은 무심한 듯 툭 놓인 느낌인데, 위에는 잘린 듯 차가운 단면을 얼굴로 내민 듯한데요. 청계천 수표교 교각을 활용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석조 교각을 3D 스캔하고, 그 데이터를 알루미늄 조각으로 만든 것이라는데, 평평한 앞면 아래로 물결진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무처럼 돌에도 나이테가 있다면, 그리고 그 돌이 어느 하천에 서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기억이 새겨졌을까요. 그러다 개발의 논리에 의해 베인 돌의 속내는 이런 것일까요. 보통의 인간이 잘라서 들여다볼 수 없는 거대한 돌덩어리가 간직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단편적이면서도 긴 세월을 간직한 이 작품이 가을 오후의 노란빛을 받으며 선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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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에서는 고성 산불 당시 타 버린 숯을 재료로 한 조각과 콜타르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지나간 것, 버려진 것, 아무도 쓰지 않는 것을 담은 작가의 흔적은 드로잉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콜타르로 그려진 인간과 나무는 재료의 특성만으로 그려진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누구도 보지 못했을 밑바닥과 그림자들을 함께 담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특히 이전 드로잉들과 올해의 드로잉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모습이 점차 단순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런 깊이가 느껴지는 것은 단 몇 번의 터치 안에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본래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합니다. 때로 지나치게 단순한 작품들 앞에서 ‘과연 이 작품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응축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그러기에 실패한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는데, 정현의 작품들은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어쩐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모양새’에 실제로 사연이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져 ‘어떻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보게 됩니다. 어떤 시간을 지나온다는 것, 그 사이 고유한 이야기를 품게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작품에 담아낸 작가의 시선을 닮고 싶어 졌습니다.


나무들이 돋아난 모든 것을 떨구는 계절입니다. 잎사귀 하나에 속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포대에 담기거나 땅에 묻히며 평범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 일상의 순간도 아마 그렇게 잊혀 가겠지요.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의 세포를 구성하는 것 또한 바로 그런 것들일 겁니다. 올해, 미처 한 번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순간들의 행복감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애정’이라 부르는 것들은 그런 일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평범한 한 발자국을 디딜 힘도, 거기서 자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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