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지독한 꿈을 꾸었던 거야

<나 혼자 본다> 23. 니키타 게일: 99개의 꿈

by per se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51105- 20260104


건너 지인으로부터 한 드라마 작가가 올해에만 30억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20년 넘도록 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이야기와 함께 말이죠.

누군가 “너 25년쯤 뒤에 한 번에 30억을 줄 테니, 그 시간 동안 최저임금보다 못 벌면서 살아볼래?”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 번에 큰돈을 만진다는 보장도 없이 그 세월을 버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한 때 편성을 받아 방송을 했던 사람이어도 말이죠. 알고도 못 버티지 않을까 싶은 세월을, 그만한 보상이 없어도 어떻게든 버틴다는 것을.

꿈이란 참 이상합니다. 특히 그것이 예술 분야 어딘가에 놓여 있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무모한 결심을 하게 되는 지점이 많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직장인과 프리랜서라는 직업을 비교하는 것이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입봉이나 등단, 데뷔와 같은 일들은 승진이나 이직이나 퇴직과 같은 모양의 징검다리로 놓이지 않습니다. 한 걸음 갔다가 돌아가려고 보면 돌아갈 곳이 없기도 하고 계속해서 놓이던 돌이 눈앞의 목적지를 두고 뚝 끊기기도 합니다. 하염없이 이게 돌다리 역할을 할지 못할지도 모를 돌이 떠내려오길 기다리다 지쳐 그 위에서 영원과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풍덩 빠져 헤엄쳐 어디에든 다른 곳에 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은 어쩐지 선택지 안에 없는 것 같고, 있더라도 못 본척 지나가게 되는 게 문젭니다. 오로지 꿈이 있는 방향 밖에 모르는 경주마 신세로 그렇게 나이를 먹습니다.

간혹 저의 그런 흔적들을 이력이라고 써내라고 할 때면, 이게 정말 내 이력인가 싶어 허무해집니다. 완전히 다다르지 못했던 곳들을 헤맨 역사, 서성이다 끝나버린 것 같은 여정을 이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과정은 실제로 우리가 꾸는 꿈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인과 관계가 분명치 않은 줄거리로 이어진 흐릿한 이야기는 끝내 완결되지 못한 채 끝날 때가 많습니다. 기억이나 하면 다행인데, 잠꼬대까지 해놓고 기분만 남고 기억은 사라져 버릴 때도 있죠.

어젯밤 제 꿈이 그랬습니다. 꿈에서 저는 만삭 임산부였고 오늘이 예정일이었는데 아기의 발 움직임까지 배의 피부 바깥으로 느껴졌으나 별로 나올 기미가 없었습니다. 실제였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 의사가 배를 예리한 칼로 아주 조금 갈라주었고 얇은 막 사이로 아이가 보였습니다. 희한하게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아기의 힘찬 움직임만이 보였는데, 그 느낌이 생생합니다. 출산은 정말 오래전 일이고 심지어 자연분만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꿈을 난데없이 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을 좀 더 잤다면 출산을 했을까요? 왜 거기서 꿈이 끊겼을까요?


이렇게 현실에서건 잘 때 꾸는 꿈이건, 별다른 메시지를 가지지 못한 채 끝나버린 꿈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제 앞에, 그 이야기를 시각화한 듯한 전시가 펼쳐졌습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갤러리의 문을 열면, 방향제는 아닌데 분명히 어떤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출입문 정면으로 아무런 작품도 없기 때문이죠. 그 순간마저 난데없이 설정된 어떤 상황 속으로 뚝 떨어진, 꿈의 도입부 같은 느낌이 듭니다.

KakaoTalk_20251204_084618524_14.jpg <DREAMS 7, DREAMS 5> (2025)


그러다 처음 만나는 것이 좌측 코너에 흐릿한 형체의 정물 사진과 같은 작품입니다. 제가 꾸는 꿈보다는 더 흐릿하고, 필름을 잘못 인화한 느낌도 줍니다. 실제로 작가가 꾼 꿈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데 설명이 없어도 그런 느낌입니다. 꿈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순간에 본 사물이라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KakaoTalk_20251204_084618524.jpg 1층에는 작품 하나 외에는 모든 벽이 비어 있다. 계단 아래 쪽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빛 뿐.

그리고 남은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 아래로 향하는 계단 쪽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보이는데요. 그쪽에서 향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약간의 소리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공포 영화를 보면 대체로 이런 곳에 가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에 가게 되는데, 이건 전시니까- 그래도 아주 특별한 주의 문구는 없으니 괜찮겠지- 하며 아래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KakaoTalk_20251204_084618524_15.jpg <99개의 꿈> (2025)

영화관에 들어선 기분입니다. 어둑한 실내에 진한 핑크색 조명이 한쪽 면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많은 작은 항아리와 주전자들에 식물이 꽂혀 있습니다. 어떤 주전자들은 버너 위에 놓여 있어 점차 끓어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그냥, 그게 전부입니다. 모두 99개인지는 세어보지 못했으나 그만큼 많은 식물들이 널려 있으나, 조명을 통해 빛을 보는 것은 아주 일부의 식물들입니다. 그들에게만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는 운이 좋아 아주 조금 빛을 볼 뿐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것은 조금씩 보글대다가 마침내 절절 끓는 순간을 맞이하는 주전자인데, 조명의 시선이란 끝내 거기 닿지 않습니다. 그냥 누가 보든 안 보든 끓여 제끼는(?) 주전자가 기특합니다.

작가의 의도가 꿈을 실제로 눈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니 당연한 얘기지만, 꿈과 정말 닮아 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기억하는 꿈은 꿈의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 그 자체입니다. 한편으로 살면서 한 번쯤 떠올려본 길들 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을 걷게 되는 인생과도 닮아 있습니다. 꿈과 인생은 그다지 닮아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하면 비슷한 데를 발견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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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있는 주전자들이 많았다. 조명 받지 못한 주전자들, 간혹 끓는 주전자를 한참 보다가 나왔다.

정말 힘들 때,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떠올리는 질문- “왜 하필 그 꿈을 택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별 이유는 없습니다. 간 밤의 꿈 중에 기억나는 대목이 왜 그 부분인지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조명을 받은 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서’ 정도인데,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이유일 지도 모릅니다. 돈도 명예도 아닌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나와 닮지 않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달음질해 나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혼자 끓었습니다. 누가 보든 아니든, 끓은 다음 넣을 라면이 있든 없든 간에 일단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서 끓었습니다. 그래서 조명 밖에서 혼자 끓는 주전자가 내 모습 같아 조금 애처롭기도 했습니다.

물론 꿈을 이루지 못한 자의 흔한 넋두리이자 오버쿡 된 감정이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꿈꾸기를 중단하나요? 아니면 그 꿈이 지독한 꿈인 줄 알면서 또 엇비슷한 꿈을 꾸거나 더 지독한 꿈을 꾸기를 원할까요?


KakaoTalk_20251204_084618524_04.jpg 마치 작품이 아닌 것처럼 데스크 위에 놓여있던 작품.

단 세 작품이 전시되었다는데 나머지 한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기에, 입구의 직원에게 물으니 그 앞에 아무것도 아닌 듯 놓인 한 작품이 그것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어쩌면 그냥 이런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는 길 밖에서 만나는 우연한 것. 애초에 정답이 여러 개이거나 없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맞는 것을 찾다가, 점점 더 많은 순간 스스로와 인생에 대해 황당해하다 가는 것.

그렇다면 그동안 걸어온 길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정답이며 꿈의 종착지라고 믿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 채 걸어온 길들은 무엇으로 남을까요, 혹은 사라질까요.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개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 "아직도 꿈이 있니? 꿈이 있는 게 어디니."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낸 오늘의 자신을 내일의 동력으로 삼아 사는 성실한 그들에게서, 나는 길이 아니라 그만 두거나 계속해야 할 이유만을 찾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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