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본다> 24. 허승희: 마음이 머물다
청화랑
20251106- 20251129
크고 화려하고 묵직한 작품이 주는 감동이 있는가 하면, 찰나의 것이며 수수한 것들을 담은 작품이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이라 하면 꼭 마음이 크게 동해야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뀐 채 움찔거리는 상태도 감동(感動)이라 할 수 있겠죠. 바로 그 상태에 끌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상과 사물, ‘still life’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전시들이 꽤 있었는데 실은 그 정도의 이끌림조차 느끼지 못하고 ‘음...’ 상태로 갤러리를 나설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평범한데 특별한 것- 그게 ‘큰 감동! 큰 메시지!’를 주는 작품보다 어려울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허승희 작가의 작품을 SNS로 처음 접했을 때, 이미지 하나를 그렇게 바라보았던 생각이 납니다. 작품의 질감이나 실제 색감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미지였는데도 불구하고 ‘아, 좋다’하고 바라보았었죠. 어떤 작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평범해 보이는데 왜 이 인물의 모습이 그렇게 남았을까요. 이번 개인전을 통해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났습니다.
목줄기가 긴 사람들의 뒷모습. 보는 순간 ‘그래, 이 모습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소녀인 것으로 보이지만 보기에 따라 성별을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작품 가운데의 인물도 중요하지만 이런 따뜻하면서도 아스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배경 때문입니다. 잔잔하게 긁힌 자국 속에 드러나는 색채들. 인물의 주변을 부유하는 먼지일 수도, 인물의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뒷모습, 그중에서도 목덜미는 가장 취약한 곳 중 하나입니다. 내가 쉽게 돌아볼 수 없으며 누군가 기습적으로 다가와 이 부분을 공격하거나 뽀뽀를 해도 별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부위. 의식과 육체를 잇는 다리처럼 보이는 이 목덜미는 사실 가장 체취가 잘 나는(...) 부위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깨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리 향 좋은 바디워시로 잘 씻어도 금세 그 사람의 냄새로 갈아타는 애증의 부위이죠. 물론 과학적 근거는 없고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만원 지하철에 올라타 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남의 뒷덜미 냄새, 남의 정수리, 남의 등판 냄새를 맡으며, 저는 자연스레 그 사람의 청결도와 함께 그 사람 본연의 냄새를 생각했습니다. 일생 만성비염으로 살았는데도 후각이 지나치게 예민한 덕분이죠.
그런데 그런 ‘개코 인간’이라 좋을 때도 있었으니 바로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아기 손에 ‘코 박고’ 그 냄새가 떠나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유일한 안도와 평화의 냄새였고, 그 냄새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그 이상의 행복이나 불시의 불행도 모두 비켜갈 것 같았죠. 어떤 사랑도 믿지 않는 사람도 그 냄새를 맡으면 갑자기 감화될 것 같은, 이 어른의 세계에 없는 냄새. 당연하게도 그 냄새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 아기가 사춘기 청소년이 된 지금, 유일하게 허락된 부위는 목덜미입니다. 허락이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코 박고 싶을 때 들이대도 별 말없이 놔두는 부위라 해야 할까요. 당연히 냄새도 그때의 냄새는 아니라서 ‘이것이 사춘기 냄새인가’할 때가 많고, 그 냄새가 침구에 배면 그건 또 그렇게 싫은데, 이상하게 특유의 살 냄새는 좋습니다. 냄새가 변한 만큼 그 냄새가 불러오는 감정도 다릅니다. 이제는 바스러질 것 같은 영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쳐 이렇게 나보다 한 뼘 이상 큰 청소년이 되어 함께 존재한다는 다행스러움에 더 가깝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듯이 별의별 잔병치레를 치르며 나름의 면역력을 가졌다는 장한 마음과 동시에 ‘장애 진단 이후 너와 내가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지만 너와 함께라 외롭지 않다는 동질감’이 그 냄새를 타고 내 몸에 흘러듭니다.
요즘은 그런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고 가끔 창 밖을 바라보는 뒷모습, 큐브를 맞추기 위해 몇 달째 씨름 중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네 목줄기도 제법 큰 나무 같아졌구나.’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세상의 톱니바퀴에 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 온 너의 목줄기가, 등골이, 이제 꽤 굵직해졌구나. 그동안 얼마나 애썼니. 이런 말들을 혼자 중얼거릴 때가 많습니다.
이 작품들에 담긴 목줄기들은 연약해 보이지만 어딘가 강인해 보이는 데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톤 다운되어 있지만 배경보다 더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 목줄기는, 흙에서 영양분을 빨아올리는 나무의 속내를 닮은 듯 보입니다. 이 목줄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흙냄새를 닮은 체취가 날 것 같습니다. 작품 속 저 목줄기들의 사연도 궁금해집니다. 어떤 마음을 딛고 자라난 것일지. 머릿속 생각을 떠받치기에 힘이 부치지는 않는지 말이죠.
반대로 나뭇가지가 사람의 혈관처럼 그려진 작품도 있습니다. 어깨엔 파랑새가 앉아 있는 이 작품은 그야말로 행운이 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는 대부분의 인간과도 비슷합니다. 파랑새를 어깨에 두고도 기꺼이 끝을 알 수 없는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한 인간의 마지막 평온한 한 때가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파랑새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파랑새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풍경이 극도로 배제된 작품이 많고 전체적인 색감이나 인물의 이목구비나 표정까지도 생략된 경우가 많았는데,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더 쉽게 어떤 순간의 어떤 인물의 상태를 자유로운 상상의 여지 속에서 읽기가 수월합니다. 제목을 참조하기보다 작품 속 인물의 '상태'를 짐작해 보며 돌아오지 않을 나의 순간과 감정을 함께 포착하는 것만으로 위안이 됩니다. 특별한 감동이 아닌 내 곁의 익숙한 감동이라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다른 어떤 각도의 인물이 아닌, 역시 뒷모습과 목줄기가 드러난 작품들입니다. 작품을 보면 작품 속 사람과 내가 자연스럽게 같은 곳을 봅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선 상태로는 그 순간의 서로를 영원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친밀감이 있고, 관람객인 나의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아도 뒷모습을 내주었다는 다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래도록 그 모습을 응시할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 나에게도 몇은 있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뒷모습과 목줄기를 오래도록 편안하게 내어줄 다정한 사람, 당신에게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