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왜 그렇게 우유부단하니?"
다친 곳이 미처 다 낫지 않았는데 또 그곳을 다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그 상처는 흉터가 된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 나에게 우유부단이라는 단어는 그런 흉터다. 아무것도 아닌 단어가 내 가슴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제 막 상처에 딱쟁이가 생겼을 무렵 다시 그 단어가 나에게 다시 와서 딱쟁이를 벗겨내고 상처를 후벼 팠다. 그게 반복되자 내 가슴에는 깊은 흉터가 생겼다.
내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건 인정한다. 나는 결정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우유부단하지 않다는 해명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단력이 부족하거나 결정을 내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그렇게 나쁜가에 대한 것이다.
우유부단이라는 단어는 의심의 여지없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나에게 그 단어를 꺼낸 이의 표정은 매우 못마땅하고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 인연을 맺은 초기에 결정을 쉽게 못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 모습을 보며 신중하고 사려 깊다고 했었다. 그래서 참 좋다는 말을 하는 그들의 얼굴은 지금과는 분명 달랐다.
나는 항상 여러 가지를 함께 생각한다. 예를 들면, 같은 돈으로 어떤 것을 먹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결정일까를 고민하고,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 인지를 생각하며 움직인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움직이기 전에 고민하고 생각해서 바로 움직이면 되지 않느냐고. 나도 그러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가령 내가 오늘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면 나는 약속 장소 주변의 맛집을 찾는 것이 최선의 노력일 수 있다. 그가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어떤 인테리어를 한 음식점을 좋아할지, 어떤 분위기의 식당을 좋아할지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알기 어렵다. 거기에 만났을 때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알 수 없다. 양식을 좋아하던 그가 오늘따라 한식을 먹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필 가려고 했던 식당이 개인 사정으로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 등등의 그 모든 것을 내가 알고 움직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은 만나서 그 사람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듯 결단력 있게 우리 이거 먹어요 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여기도 괜찮고 저기도 괜찮은데 어디 갈까요?라고 물었다. 그런 내 모습에 처음에는 배려있고 신중하다고 이야기하던 그 사람은 어느새 나에게 우유부단하다고 말한다. 나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표정은 정반대가 되었다. 이것은 나의 잘못일까?
정말 사소한 것이나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에는 결단력이 반듯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아직도 결단력 있다는 말을 듣기는 어렵지만 사소한 결정은 꽤 빨라졌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조차, 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서조차 나는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은 매번 나에게 화살이 되어 가슴에 상처를 내며 박혔다.
이제는 누가 나에게 우유부단하다고 말하면 순순히 인정한다. 굳이 내가 우유부단한 게 아니고 신중하다고 항변하지 않는다. 네 맞아요라고 말하며 돌아서서 흉터를 쓱 매만지며.. 과거에는 쉽게 결정하는, 소위 말해 결단력 있는 이를 부러워했었다. 나는 하지 못하는데 너무도 쉽게 결정하는 그 모습에 질투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나는 내가 항상 신중했으면 좋겠고, 매번 다른 누군가를 배려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내가 힘들어도, 가끔은 그러한 내 행동이 우유부단이라는 단어로 돌아올지라도, 나는 그런 나를 나로 인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