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Feb 01. 2020

'변수'

아무것도 아닌 단어 하나

겨울방학을 앞두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겨울 방학 계획표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만든 아이들의 계획표, 대부분의 계획표는 비슷했다. 도화지 위에 큰 원을 그리고 1부터 24의 숫자를 원 밖에 적었다. 그리고는 원을 몇 개의 칸으로 잘라 하루 일과표를 만들었다. 꿈나라, 아침, 점심, 저녁, 공부, 휴식 등등... 각각의 칸이 아이들 별로 크기는 조금 달랐지만, 계획표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계획표를 확인하던 선생님은 한 아이의 계획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의 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아이의 계획표. 그러나 그 아이의 원 아래에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던 빼곡히 적힌 글자가 있었다. 도화지 한 면으로는 부족해 또 다른 도화지까지 연결된 그 아이의 계획표. 그 아이는 휴식을 종류별로, 기간별로 나누었다. 그리고 공부를 분야별로, 기간별로 나누었다. 그렇게 모든 칸에 적힌 계획을 세분화하여 글로 적은 어떤 아이의 계획표,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그러나 나는 도화지에 빼곡히 적은 글처럼 방학을 보내지 못했다. 내 딴에는 정말 계획적으로 방학을 보내겠다고 작성한 계획표였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늦잠 자지 않겠다고 눈을 비비며 아침에 일어났고, 오늘까지 책 한 권을 읽겠다고 적힌 계획표대로 하기 위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고 계획표에 적힌 것 중 동그라미가 쳐진 것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동그라미를 치지 못한 목표를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목표와 계획, 그러나 채 반도 달성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 그리고 더해서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


자꾸 내 예상에 없던 무언가가 찾아와 내가 계획했던 것을 못 하게 방해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감기가 날 찾아오기도 했고, 가족 행사가 생기기도 했다. 심지어 잘 모르는 친척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내 계획표가 무너졌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날짜가 밀리면서 나는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질수록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줄어들었다. 그렇게 내가 짰던 계획표는 엉망이 되었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찾아왔던 그 '변수'가 정말 싫었다.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나를 찾아와 내 노력과 계획을 망치는 변수, 그 변수들만 없었다면 분명 그때 그 방학 기간은 완벽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변수, 말 그대로 어디서 튀어나올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는 무엇. 나는 그 변수에 약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획한 것을 달성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나에게 변수는 반갑지 않은, 아니 제발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불청객과 같았다. 내 바람과 다르게 그 불청객은 거의 매번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내가 세운 계획을 엉망으로 망쳐 놓았다. 아주 가끔 그 불청객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꽤 괜찮은 성과를 냈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욱더 그 변수라는 불청객이 싫었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 중 하나가 변수를 즐기는 사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변수가 나타날 때마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나와 다르게 그 변수를 즐기는 사람, 예상하지 못한 변수조차 자신의 계획에 있던 상수인 것처럼 활용하는 사람. 나는 그 사람들이 정말 부러웠다. 그래서 노력해봤다. 그 사람들처럼 변수를 상수처럼 받아들이겠다고. 내 노력에 나는 변할 수 있었을까? 


30년이라는 꽤 긴 시간도 불청객을 반가운 손님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여전히 변수는 나에게 불청객일 뿐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지금도 나는 계획을 세웠고, 세울 것이다. 올해도 또다시 변수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변수를 예상해서 계획을 짜라고 말이다. 예측해서 계획을 짜는 순간 변수는 더는 변수가 아니다. 그럼 내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또다시 변수라는 이름으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럼 또 내 계획은 흔들리고 망가질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계획을 세운다. 내가 세운 계획은 또다시 휘청일 거고 어쩌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가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것은 어린 시절 내 방학 계획표처럼 계획의 반조차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래도 내가 이루는 게 있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지만, 계획의 일부분이나마 나는 이뤄냈고 그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계획을 세운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