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_IRB 서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본격적인 박사 연구에 들어서다.
17_IRB 서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본격적인 박사 연구에 들어서다.
**본 편부터는 논문을 쓸 당시 남겨둔 기록을 중심으로 작성하기에,
말투나 시제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고려하여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석사 과정 때도 그랬으나, 논문은 참 쉽지 않다. (잠깐 회상을 해보자면) 석사 때는 정말 패기 그 자체였다. 어린아이가 뭣도 모르고 하고 싶다고 무작정 시작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어떤 연구자인지, 연구자로서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수준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때는 심리학 자체를 이제 막 시작한 때였기에 지금처럼 상담은 물론 심리학 자체에 경험도 지식도 있지 않았다. 그땐 연구/논문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몰라서 그냥 냅다 인쇄해서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속도는 안 나고, 다 읽었는데도 '뭐가 핵심이었지?'라고 되물으면 말문이 막혔다. 속상했다. 허무했다.
나는 부족한 사람. 충분하지 않은 사람. 딱 거기에서 제자리 뛰기를 한 사람 같았다. 분명 열심히 했고, 땀이 나고 숨이 턱까지 차는데도, 나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중요한 건. 좌절도 컸으나 놓고 싶진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꼽긴 어렵다. 왜였지? 근데 그때도 지금도, 힘들어도 놓을 수가 없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이를 통해 얻는 물질적인 이득도 없다. (오히려 물질적으로는 손해일지도?) 아직 내가 기대한 지점에 오지 않았는데 그냥 저버리는 것이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냥 그래도, 그래도, 도전하고 싶고,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놓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일단 난 여기에서 여전히 걷기도 뛰기도 쉬기도 하고 있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나 자신에게 매일 전하는 인사처럼.
요즘 가장 열심히 하는 것 중 하나. 매일 운동도, 식단도 아닌 이것. 회의감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바로 사로잡힌다. 내 경험이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만은 전부인 걸. 박사과정에 들어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열정을 가진, '심리치료' 관련 주제로 연구하는 박사 학생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다들 어디에 숨어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이제는 찾겠다는 기대를 버려야 하는지.
지도교수는 말했었다. 연구를 원하지 않은 박사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얹는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박사도 정말 손에 꼽는다는 사실. 그저 학구적인 이유도 아닌 이유로 박사에 들어와서 졸업에만 목을 매는 학생들, 자신이 원하는 주제에 대한 고민도, 그에 대한 도전이나 시도도 없이, 주제를 받아서 빨리 끝내버리려는 사람들. 수료 후 연기처럼 사라진 사람들.
졸업에만 목을 매는 학생들,
자신이 원하는 주제에 대한 고민도,
그에 대한 도전이나 시도도 없이,
주제를 받아서 빨리 끝내버리려는 사람들.
수료 후 연기처럼 사라진 사람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금방 회의감의 굴레로 빠져버린다. 매번 가장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회의감, 좌절감에 너무 깊게 잠기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공부, 상담, 연구만 해도 부족함에도, 열악하고 모호한 한국의 현실에서 '나를 잃지 않고 전문성을 세우기'위한 노력.
그래서 필사적으로 나를 붙잡는다. 아냐, 이건 내가 집중할 게 아니다. 일단 내 길을 가보자. 나도 그들처럼 연기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내 연구와 IRB, 그리고 서론 작업이 시작됐다.
박사 연구의 뼈대를 잡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 고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한 일은, 그 연구와 연결되는 연구를 하나 더 구상하는 것이었다. 박사 학위 논문은 연구 문제가 최소 두 개 이상이기 때문이다.
지도교수와 면담을 가졌고, H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연구를 두 번째 연구로 두라고 했다. 그전에, 여기에 연결할 연구를 하나 더 구상하라고. 사실 처음엔 동기가 잘 안 생겼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는 그 자체만으로 최소 1년은 잡고 들어가야 할 만큼 설계도, 내용도 볼륨이 컸다.
그래도 하나 더 있어야 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연구를 구상했다. 이 주제는 H의 메인 트랙에서 조금 벗어난 주제라, 최대한 나에게 납득이 갈 수 있도록 나름 많이 버텨가며 고민했다. 내가 정말 보려는 상황은 무엇인지, 이게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지, 상담에는 어떻게 기여할지. 그 생각만으로 2–3주간 영어 논문 속에 파묻혀 살았다.
연구는 그냥 “내가 하고 싶다”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이 되어야 하고,
또 말이 되어야 하고,
다시 말이 되어야 한다.
연구는 그냥 “내가 하고 싶다”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이 되어야 하고, 또 말이 되어야 하고, 다시 말이 되어야 한다. 왜 이걸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상담 연구라면, 이게 실제 상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상담자든 내담자든 무엇에 의미가 있는지 분명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박사 졸업용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 5년 동안, H에게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도교수 H가 엄청나게 권위적이어서도, 같이 있으면 불편한 사람이라서도 아니었다. 나는 수줍었고, 내 안에 이런 생각이 컸다. “박사라면, 대학원생이라면 이쯤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야지.”
그래서 뭘 물어보기 전에, 부탁을 하기 전에, 혼자 할 수 있는 만큼 최대치를 찍고 나서야 H에게 갔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석사 때부터 나에게 박혀 있던 당위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연구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박사과정이다.”라는 말을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돌아보면, 이게 H와 나의 역동을 더 기묘하게 만들었다.
학생 입장에서는, 뭘 모르는지 몰라서, 그래서 “어디부터 훑어야 하는지, 어디를 먼저 잡고 가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건데, H는 늘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걸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게 뭔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그걸 정리해서 물어보라니.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마저도 없다. 샘플 파일 하나, “이런 식으로 쓰면 된다. 별거 아니죠?”는 말이 전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혼자 버티려는 쪽에 가까웠다. 두 손 놓고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단했고, 동시에 더 또렷하게 보였다.
어떤 박사 학생은 0% 상태로 와서 “서론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H에게 칭얼대고, H는 아웃라인을 “처음부터 같이” 짜주는 장면도 봤다. 여전히 경악스러운 장면이다.
반면, 나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끌고 가서, 거의 70–80%를 써놓고 나서야 H에게 가져갔다.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했다.
질문을 더 명확히 가져오세요.
결국 이 구조에서, 가장 이상한 점 하나는 이렇다.
아무것도 안 해오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는 학생에겐, H가 생각보다 많이 떠먹여 준다는 것.
끝까지 끌고 가보고서야 질문을 들고 오는 학생에게는, “질문이 충분히 정리될 때까지” 거의 말이 없다는 것.
노력의 방향과 지도의 분배가,
엉뚱하게 뒤집혀 있다.
납득할 수도 없는 현실을.
납득해야만 하는 이 현실을.
연구를 시작하기 전, 나는 IRB 관련 교육과 도서관 교육을 1학기 때부터 찾아들었다. 아무도 “필수”라고 안 해줬지만, 나는 그게 필수라고 느껴졌다. 석사 때도, 교내에서 거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교외 IRB 윤리 교육을 혼자 찾아가서 들었다. 이런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는데 왜 아무도 안 오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본교 IRB는 까다롭기로 유명하고, 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었다는 팻말도 봤다. 도로 말하면, 서류가 많고, 과정이 복잡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zip 파일을 열었을 때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11개였다. 심의신청서, 계획서, 설명문, 동의서, 설문지, 지시문…
IRB는 “이 연구가 의미가 있느냐”보다, “연구자가 윤리를 제대로 지키느냐”를 본다. 연구자로서 이 과정은 당연히 중요하다. 동시에,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교수 H가 해준 건, 간단한 구조 설명과 샘플 파일 몇 개가 전부였다.
“이 정도면 알겠지?”라는 또 그 말.
그래서 나는 샘플 파일을 옆에 놓고, 내 연구에 맞게 하나씩 빠짐없이 맞춰 넣는 작업을 했다. 연구가 두 개이기 때문에 IRB도 두 개를 나눠 준비해야 했다. 참여자도 다르고, 설계도 다르고, 분석 방식도 다르니까. 서론을 먼저 써둔 덕분에 완전히 공허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혼자서 챙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심사 날짜를 놓치면, 연구 시작이 한 달씩 밀린다.
IRB 신규 심의 1건당 10만 원. 연구 1, 2를 한 번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을 IRB 측에서 듣고, 그나마 비용 10만 원은 아껴보기로 했다. 그 10만 원이 있으면, 분석팀에 조금이라도 더 쓰고, 참여자 보상에 조금이라도 더 쓸 수 있으니까.
연구는 심리적, 인적 자원, 그리고 물적 자원이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구조다. 그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느끼는 건 연구자 본인이다.
연구 1 예비 설문지는, 처음에 20문항으로 시작했다. 국내 논문만 수십 편을 읽었고, 참여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 맥락과 표현을 하나하나 맞춰 넣었다. 하지만 H의 1차 피드백은 처참했다.
그 자리에서, 내 문항은 거의 다 부서졌다. H 앞에서 나는 스펀지 같았다. 구멍 숭숭. 여기저기 뚫려 있는 느낌. H의 피드백은, 답을 주는 방식이 아니다. 내가 놓친 것, 빈 구멍, 말이 안 되는 부분을 “표시”만 하는 방식이었다. 지적은 정확하기도 아니기도 했다. 부가적인 과제인, 그 지적과 지적 사이를 어떻게 메울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그래서 2차로 18문항으로 고쳤다. 다시 보냈다.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답이 없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혼자 문항을 줄이고 다듬어 12문항으로 만들었다. 놀랍게도, 그제야 H에게서 답이 왔다.
훨씬 나아졌네요.
딱 한마디. 어떠한 구체적인 부분 없는 표현. 역시나 기대는 내려놓는 편이 좋다. 그에 대한 나의 신뢰와 기대는 점점 부서져가고 있었다. H는 늘 그랬으니까.
첫 타격은 세다. “이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뼈 깊이 새기게 만든다. 그다음 과정은 텅 비어 있다. 중간의 수정과 시행착오는 전면적으로 학생에게 떠넘겨진다. 학생이 혼자 세 번쯤 뒤집어서 거의 완성형에 가까이 가져가고 나서야, “이제는 괜찮다”는 판정을 내려준다.
과정에 대한 동행은 없고, 결과에 대한 통/불통만 있다.
나는 이런 피드백을 그저 “나쁘다”라고 단정하진 않으려 한다. 내 역량이 실제로 많이 단련된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건 교수의 가장 필수적인 책임인 교육에 있어서, “지도”라기보다 “검사”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간극은, 결국 “소진”의 형태로 학생(연구자)의 몸과 마음에 남는다.
이건 교수의 가장 필수적인 책임인 교육에 있어서
“지도”라기보다 “검사”에 더 가깝다.
IRB 계획서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결국 나는 연구 방법을 한 번 더 크게 바꾸기로 했다. 초반부터 약간 우려되던 지점이 있었는데, 조금 더 욕심을 내보기로 한 것이다. 연구자로서 내가 더 삽질해야 하는 방향이지만, 결과는 더 의미 있게 나올 수 있는 방향.
문제는, 내가 추가하고 싶은 분석 방법이 국내에서는 쓰이지 않은 방식이라는 거였다. 처음 그 방법을 읽었을 때, 나도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거지?”
그래서 수십, 수백 편의 국내외 논문을 뒤져봤다. 비슷한 키워드, 비슷한 설계, 조금이라도 교집합이 될 것 같은 연구를 다 찾아봤지만, 국내 연구 논문에서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있었다면 진작 참고했을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외 논문들을 더 깊이 파고들어서, “왜 이 설계에서 이 분석이 필요한지, 왜 이 순서로 진행해야 하는지”를 나 스스로 이해하고, 그걸 그대로 IRB 계획서와 연구 설계에 녹여 넣는 일뿐이었다.
이 지점에서 H가 해준 건 여전히 같았다. 기존 샘플 파일, 형식, 틀. “이런 형식으로 쓰면 된다”는 선에서 멈추는 피드백. 샘플과 다른 설계를 택하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전부 내 몫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했다.
“연구자로서 H는 분명 뛰어난 점도 있는데,
왜 이 장점을 학생 교육에는 제대로 쓰지 않는 걸까?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까?”
H의 글은 정갈하고, 논지는 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쓸데없는 내용이 없고, 문단과 문단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H의 글을 많이 참고했었다.
그런데 그 필력과 구조화 능력이, “학생에게 구조를 가르치는 일”로는 옮겨지지 않는다. 샘플은 있지만, 설명은 없고, 질문이 완벽히 정리되기 전까지,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게, 이 관계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11월 말, IRB를 최종 접수했다. 그 이후 약 1주일 동안, IRB 간사에게서 피드백을 받았다. 나의 경우, 28개의 수정 요청이 왔다.
하나하나 읽고 수정했다. 대부분은 윤리적 사안과 설명의 일치 여부, 실제 과정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아, IRB를 안 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부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 2주 뒤, IRB 승인 회의가 열렸고, 12월 28일에 결과를 받았다. 결과는 “시정 승인”, 학술지로 치면 “수정 후 게재”에 해당하는 상태였다. 추가로 8개의 수정 평가를 받고, 그걸 고치면 최종 승인.
결과를 앞두고 며칠간, 긴장이 높았다. 이게 떨어지면, 모든 일정이 몇 달은 밀린다. 연구 전체가 한 칸씩 뒤로 밀려나는 느낌. 수정이 끝나고, 1월 2일.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딱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이제 진짜 무를 수 없는 시작이다.”
IRB는 출발선의 신호 같다. 이 신호가 켜지기 전에는, 연구는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 승인이 떨어지는 순간, 연구는 더 이상 머릿속 프로젝트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현실”이 된다.
IRB를 준비하고, 수십 개의 서류를 작성하고, 간사와 위원들의 피드백에 따라 수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한 가지를 점점 더 분명하게 느꼈다. IRB는 그냥 “통과해야 하는 행정 절차”가 아니다. 연구자가 자기 연구에 서명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 연구를 이런 방식으로, 이런 대상에게, 이런 보호 장치를 갖고 진행하겠다.”
그 약속에 사인하는 과정이다.
내 경우에는, 여기 하나가 더 붙었다.
“나는 이 연구를, 한국의 정서중심치료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연구로 만들겠다.”
이 말을 나에게, 그리고 내가 만날 내담자와 다른 상담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IRB와 서론과 설계 전체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내 에너지가 더 닳더라도. 지도교수 H의 허술한 구조, 국내 EFT 연구의 엉망인 풍경, 슈퍼바이저와 교수들의 대충 던져놓은 과제들… 그 모든 사이를 통과해서도 “그래도 이건 내 연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뼈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IRB 승인 결과를 다시 떠올리며 이렇게 적어두었다. 이 과정은 외롭고, 답답하고, 아무도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때로는, 내가 왜 이런 길을 고집하는지 스스로도 헷갈린다. 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IRB와 서론, 설계를 붙잡고 버티는 동안, 나는 국내 EFT 관련 논문과 책들을 깊게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은 간단했다.
“안심과 씁쓸함.”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연구 문제와 비슷한 논문이 약 2년 전 게재된 적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하려는 연구와 너무 겹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정말 필요한 연구였으면 좋겠다”는 기대였다.
결과는, 절반만 충족했다.
G라는 교수는, 이전에도 들어봤던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교육학과 교수로 제직 중이며 국내의 정서중심치료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교수 B를 뒤이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B든, G든 그들은 박사논문이 EFT와 관련 없는 건 물론이고, 처음부터 EFT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고 갑자기 자신들의 연구나 방향이 EFT라며 주장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그러고 있다.)
G는 정서와 EFT 관련 논문을 다수 게재했고, 지도 학생들에게도 그와 관련된 연구를 많이 붙인다. 그런데 그 사람의 학위논문과 이후 논문들을 보면, EFT를 처음부터 제대로 알고 한 건 아니라는 게 바로 드러난다. 뒤늦게 EFT를 접하고, 해외 EFT 연구 결과를 열심히 가져다 붙였지만, 정작 EFT의 본질보다 본인이 밀고 싶은 부분을 은근히 끼워 넣는다.
그의 지도 학생들의 연구도 그런 식의 “물타기”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Y라는 교수는 본인이 EFT 전문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책과 논문을 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EFT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처럼 EFT 개념과 이론을 한국어로 제목만 바꾼 이론이 출판되었다. 실제로 그가 직접 개발했다고 하는 저서를 보면, 핵심은 모두 Emotion Focused Therapy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자격과 학력을 앞세워, 여기저기서 그 내용을 “자기 이론인 양” 전하고 다닌다.
교수가 되기까지, 위로 올라가기까지 실적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한다. 때로는 질보다는 양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겠지. 하지만 최소한 “이 분야의 전문가, 교육자”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연구를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실증 연구라 하고, 과정 연구라 하고, 정서와 관계를 다룬다고 서론에서 그럴듯하게 적어놓고, 정작 결과와 분석은 그 목적과 연결되지 않는다. 용두사미식 연구. 그걸 또 학생들에게 그대로 내려보낸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뻔뻔해 지기로 했다.
“그들은 넘보지 않는, 정말 필요한 연구를, 내가 해보겠다.”
정서중심치료에 진짜 도움이 되는, 실제 내담자와 상담자에게 의미 있는 연구를 하고 싶다. 내가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 부족한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 있는 이 연구가, 그 사람들이 해온 연구보다 덜 부끄러울 것임은 확신한다.
...to be continue.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이며, 사용된 이니셜 또한 실명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특정 인물을 지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본 글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구조적 성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