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_ 꺼지지 않은 마음에서, 다시 불을 켜다
석사과정은 모르고 시작해 본 길이라면, 이다음은 이미 알게 된 것들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다. 무엇이라도 알게 되면, 예상과 염려가 더욱더 짙어진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망설임은 더 자주 찾아왔고,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모르면 대담할 수 있다는 말처럼, 알고 난 다음은 더욱 큰 담대함을 요한다. 나의 박사과정의 시작은 그랬다. 또 한 번의 담대함을, 더 큰 무모함을 필요로 했다.
*소소한 기억:
고등학교 2학년쯤, 살면서 가장 대담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유학이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다녀와본 사람이라면 더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실은 좀 무모해야지 가능한 선택이다. 이때가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한 처음이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겠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누구와 비교하든 상관없이, 나에겐 일생일대의 선택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과학수사(CSI)에 빠져있었는데, 탐구하고, 추론하고, 도출하는 그 과정이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이를 배워보겠다고 국내 대학은 물론 이를 배울 수 있는 방편을 엄청나게 뒤지고 또 뒤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과학수사, 범죄심리학(범죄심리학은 엄밀히 말하면 과학수사와는 다르다)이 주목받지 못했을 때기에, 어쩔 수 없이 나의 시선은 국외로 갈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고, 내신 성적은 좋지 못했으며, 수능 등급은 중간 이하였다. 집안 재정이 녹록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가족의 불화는 최악으로 치닫는 때였다.
겨우 찾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움켜쥘 수 없었던 때였다. 그때 내적갈등을 겪으며 얼마나 스스로 깎아내렸는지 모르겠다. 매번 속으로 내가 부족한 점을 읊으며, "잘하지도 못하잖아. 실패할 거야. 엄청 좌절할 거야. 후회할 거야"라는 말만 계속 대뇌었던 것이 기억난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았음에도 그것을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대며 자신의 부족함을 후벼 파는 일은 겨우 청소년이었던 나에겐 몹쓸 짓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곤 선택지가 없었다.
어느 날, 지금 생각하면 어떤 계기였는지도 신기할 정도지만, 스스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벼랑 끝에 놓인 그 순간에 변화의 찰나가 찾아왔다. "그래 좋아하는 일이면, 그냥 해봐. 한계를 미리 짓지 말자. 해보면 되잖아. 좋아하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걱정되는 거잖아. 엄청 좋아하잖아. 그럼 된 거야"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이후로, 다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그 선택을 비난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혼자 남들은 부모, 교사, 유학원이 찾아주는 정보에 돈을 지불하고 이용했지만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나는 혼자 힘으로 한 번도 안 가본 낯선 서울 유학원 거리를 홀로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유학을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정말 국내 대학을 입학했을 때 들어가는 딱 그 정도의 학비와 생활비만, 부모님과의 정말 길고 긴 설득과 다툼, 갈등을 모두 겪고 나서야 최소한의 조건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때가 고3 수능 1개월 남짓인 때였다. 그리고 정확히 3개월 뒤, 한 번도 디뎌보지 못한 미국땅에 홀로 서게 된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을 기억한다.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어떤 시련과 좌절이 앞에 있더라도, 하고자 했던 좋아하는 일이라면 끝까지 가보자고. 그리고 절대 나의 이 감정을, 이 진심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기로.
그 다짐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항상 옳은, 딱 맞는 선택을 해오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땅을 치고 후회하거나 절망한 순간은 없었다. 그 덕분일 거라 확신한다. 나의 실현경향성을 따라가며 시련은 겪을지라도, 한 번도 내 중심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게 지금의 나의 자원이자 중심이 되어주고 있다.
석사를 졸업한 뒤 1년 반이 지나가는 시점부터,
박사과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석사과정이라는 심화 교육을 받은 거라면, 그 정도의 확신이나 자신감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여전히 연구와 상담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제대로 된 심리치료 연구를 하고 싶었다. 내가 계속 갈망하던 연구를 하고 싶었다.
석사를 졸업하고도 한동안 계속 연구를 통한 성장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한국의 심리학 석사 과정은 뭔가 애매하게 걸쳐있는 경험을 주었다. 뭔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조금 맛만 본 느낌. 그래서 이론과 실제가 공존해야 하고, 그 경험이 전문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상담심리학(심리치료) 전공자에겐 뭔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앞서 말했듯 한국의 석사과정은 고등 교육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끝나고 받는 기분은 "나는 정말 모르는구나. 뭔가 제대로 알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든다."일 것이다. 그러니 석사 과정조차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열악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전문성이란, 이론과 실제가 통합되는 전문성이며, 이론은 기본 양분이 되고 실제는 여기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론은 누군가의 뇌피셜로 정립되지 않으며, 전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해서 이를 아우르는 전문 용어로 설명하고 정리하며 만들어진다. 그리고 실제는 그런 이론을 바탕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수많은 현상을 바탕으로 이론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창조해 가는 과정이 어우러지며 퍼져간다. 그러니 실제 없는 이론은 없고 이론 없는 실제는 없다. 그 둘은 항상 같이 가야만 하는 관계이다.
특히 심리학은 영미권 학자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은 비 서구권 학자들의 기여로 한쪽으로만 쏠림 현상이 극심하진 않지만, 여전히 서구권 이론과 실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 가장 알아주는 SCI 학술지들은 영어로 쓰인 논문인 것부터가 그렇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기에 석사를 졸업하고 실무 경험을 쌓으면서 국내의 산발적이고 체계 없는 사설 교육이나 수퍼비전은 전문가로 성장한다는 경험을 하기에 턱 없이 보잘것없었다. 실제로 한국의 대학원뿐 아니라 그 외 전문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부분 한국상담심리학회 또는 한국상담학회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과정들) 교육들은 그 수준이나 진행에 있어서 산발적이고, 개인차가 너무 커서 체계적인 교육이라고 느끼기가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해당 교육들을 이끄는 수퍼바이저라는 교육자들인데, 그들의 역량은 신뢰도와 타당도가 떨어진다. 즉, 그들이 충분히 유능한 교육자인지 알 수가 없다. 국내 학회는 수퍼바이저라는 교육자를 선별하거나 관리하지 않는다. 1급 자격증을 취득하면 자동으로 시간이 지나면 수퍼바이저 타이틀을 걸게 된다. 이는 학회가 만든 피라미드 권위자 체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더 혈안이 되어 자격증 장사를 하고 있다고밖에 보일 수밖에 없다. 교수 같은 교육자들로 이루어진 학회라는 곳이 정작 정말 필요한 교육과 교육자를 양성하는 덴 관심이 없다. 거기다가 그러한 검증 안된 교육자들이 제공하는 교육은 비용도 어마무시하다. 처우가 열악한 한국 상담자들이 감당하기엔 숨이 찬다. 그래서 한국에서 경험을 쌓으며 전문가가 된다는 건 마치 도박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상담자들의 동기가 낮아져 버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그 당시에도 나는, 뭔가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강했다. 실무 경험 외, 마음 놓고 원하는 만큼 충분히 내가 탐구하고 싶은 주제에 푹 담겨서 열정을 불태우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이 갈증이 풀릴 것 같다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정말 하고 싶은, 실무에 필요한 연구를 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마음일 것이다.
석사에서 경험한 정도로는 뭔가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이 갈증은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 나만의 소속, 즉 브랜드를 만들고 심리상담센터를 개소하게 되는 바탕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얘길 들어보면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로 센터를 개소했는데, 나의 가장 첫 이유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전문가로 성장할 소속이 필요해서였다. 연구를 하고 논문을 투고할 때 소속이 있는데, 센터를 개소하기 전에는 어디 소속이라고 적을 수가 없었다. 프리랜서 상담자에겐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의 소속을 내가 만들자 라는 마음으로 센터를 개소하게 된다.
하지만, 센터를 개소한 초기에는 관리와 운영, 상담진행만으로도 너무 빠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센터, 상담연구소는 말만 센터와 연구소이지, 정말 연구와 논문을 진행하기엔 제약이 많다. 실제로 연구를 진행하는 '상담 연구소'를 본적이 지금까지도 없다. 실제로 연구가 진행되는 연구소는 우리가 길가에서 마주치는 상가의 연구소가 아니라, 대학 부설 시설로 들어가 있는 연구소 또는 연구과제를 따오는 교수가 수장으로 있는 그런 곳들이 대다수다.
그래서 학교로 눈을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아무리 아쉬운 곳이어도, 학문의 정수라는 생각은 계속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선택지가 그때는 최선이었다. 연구를 제대로, 다시 한번, 진득하게, 내가 원하는 심리치료 분야(정서중심치료)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 선택을 내리게 된다.
이때도 한 번에 결심한 대로 바로 되진 않았다. 어느 날은 "그래 가자!" 하다가도 또 다른 날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갈렸다. 그 당시, 박사과정은 석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전보다 더 많은 시간, 비용, 노력을 할애해야 된다고 여겼기에 선택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이 당시에 개소한 심리상담센터가 손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자리 잡아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소소한 기억:
"너는 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굳이 여기까지 다 왔잖아. 아깝지 않아?" 유학을 접고 한국에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때 가까운 친구에게 말을 꺼냈는데, 친구는 다시 되물었다. 참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 당시에 나는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성적이 좋은 편이었고, 같은 시기에 입학한 친구들보다 짧으면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앞서가고 있었다. ESL 과정을 넘길 수 있는 영어 덕분이었다. 다른 학생들보다 같은 과정을 짧게 소화하고 있던 차였고, 이쯤에는 주립대학이나 그보다 높은 학교로 편입을 준비해서 들어가는 경우가 기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똑같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한국에 가서 하고 싶어." 이 역시 참 나다운 선택이었다. 유학을 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문화와 인종, 언어를 접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나의 나라, 한국'이라는 마음이 짙어졌다. 나의 언어, 나의 사람들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지 깊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과학수사는 말 그대로 수사기관 중 하나기에, 사법 시스템 하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 분야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나는 나의 조국인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한국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있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박사과정에 지원하게 되었고, 그때 지도교수 H와 처음 조우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대학원에 전해져 내려오는 악독하고 비윤리적인 그런 교수들과는 다를 거라는 기대와 확신이 컸다. 그렇게 믿었던 이유가 있었다. 한국의 권위자로서, 교육자로서 최소한 말과 행동, 자신이 가진 가치와 실천이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 그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
...to be continue.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가명이며, 사용된 이니셜 또한 실명을 기반으로 하지 않습니다. 특정 인물을 지목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본 글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구조적 성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