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볼리비아의 행정 수도인 라파즈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남쪽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서울로 따지면 강남과도 같은 곳이다. 강이 있진 않다만, 지형상 남쪽에 위치한다. 외국인을 비롯 부유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살기에 비교적 쾌적하다.
다만 실질적으로 많은 일들은 센트로에서 일어난다. 서울에 간주하면 종로 같은 곳이다. 센트로에는 관광지로 유명한 마리요 광장, 마녀 시장, 대통령궁, 국회의사당과 같은 시설이 있다. 또한 영화관이나 대학교, PC방도 위치해 있다. 북적이는 대형마트와 크고 작은 가게들이 즐비해 있으므로, 여러 가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다.
그렇기에 나도 부쩍이나 센트로에 가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 센트로는 외국인들이 범죄를 당할 수도 있는 곳으로 알려져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볼리비아의 '우버'와도 같은 '양고'로 택시를 자주 애용했다. 적을 때는 30볼, 많을 때는 50볼까지 가격이 나간다. 그러다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대중교통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편리한 대중교통은 '미니부스'다. 길거리에서 2초에 1대씩 지나다니는 봉고차다. 볼리비아에 와서 처음 맞닥뜨린 대중교통 시스템인데, 매우매우 정말 매우매우 편리하다. 남미를 돌아다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페루에도 존재하는 대중교통이라고 한다. 그러니 남미만의 특색 있는 대중교통인가보다.
미니부스는 정류장이 없다! 각 미니부스마다 돌아다니는 경로가 정해져 있는데 승객이 원하는 곳에서 타고 내릴 수 있다. 강남에서 종로를, 그리고 더 나아간다면 강북까지 잇는 대형 도로가 한 개뿐인지라 미니부스가 가는 경로도 대부분 비슷하다. 대형 도로 주변에 주요 거점지가 있으므로 그 어떤 미니부스를 타더라도 손 쉽게 내가 원하는 곳에서 탈 수도 내릴 수도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를 지나는 미니부스를 파악한다. 미니부스 운전석 앞에 대강의 경로가 적혀있으므로 유추 가능하다. 그러면 택시를 부르듯 손을 흔든다. 미니부스가 친절히 내가 있는 곳에 멈춰준다. 도로를 빠르게 지나가는 미니부스들의 경로 표지판을 파악하는 일이 조금 고될 수는 있다.
내릴 때는 좀더 어렵다. 내가 내리고 싶은 곳이 다다르면 운전사에게 큰 소리로 알려야 한다. 마치 '눈치게임'과도 같다.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 내게 이것이 조금 고역이었다. 어떤 말을 어느 시점에서 외칠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단어인 바한도(Bajando)를 내리기 직전에 외쳤다. I am dropping off의 약어와도 같다. 그런데 스페인어 선생님에게 이것을 말했더니, 그건 노인이나 쓸 법한 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떤 할아버지가 쓰는 것을 보고 이 문구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후부터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주의깊게 들어보았다. 쎄르키나(Cerquina)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은 그대로 Cerquina라고 외쳐보았다. 그랬더니 주변에 있던 현지인들이 "내리고 싶냐?"고 나에게 확인한 이후 기사 아저씨에게 다른 말로 소통해서 미니부스를 멈추게 해주었다.
쎄로 시작하고 나로 끝나는 어떤 단어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어느날은 미니부스를 함께탄 현지인 친구에게 어떤 문구를 외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Cerquina라고 외친다고 했더니 너무 한국인스럽다며 깔깔댔다. 그러고는 엔 라 에스키나(En la esquina)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Around the corner나 at the corner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esquina라는 단어를 배워서 너무 행복했다.
어쨌거나 이 미니부스가 그렇게나 효율적일 수가 없다. 버스 정류장을 1m만 지나서도 난색을 표하면서 역정을 내는 한국 버스 기사들과 대비되게(법규상 정류장 정차가 규정이므로 물론 이해하는 바이다), 이곳에선 내가 원하는 곳에 어떤 시점이든 버스가 정차할 수 있다. 또한 강남에서 종로까지 2.7볼만 내면 된다. 대강 400원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효율성의 끝판왕 대중교통은 텔레페리코다. 과장을 보태자면 내가 볼리비아에 애착을 가진 첫 번째 이유가 텔레페리코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볼리비아에 10년을 살라고 한다면 텔레페리코 때문에 살겠노라고 말하겠다.
텔레페리코는 다름 아닌 곤돌라다! 그리고 이 곤돌라는 한국에 비유하면 지하철과도 같다. 라파즈 전역에 색색별로 10개 호선이 있다. 각 호선마다 3개 가량의 정류장이 있어 시스템이 그리 복잡하지 않다. 보통 5볼 정도 낸다. 대강 700원이라는 뜻이다.
단연코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텔레페리코 설치라고 할 수 있다. 분지 지역인 라파즈는 매우 넓지만 경사가 많은지라 도로가 적고 좁다. 그래서 교통 체증이 심하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하늘에 메단 것이다. 라파즈의 들쭉날쭉한 고도를 고려하면 하늘에 있는 대중 교통은 이러한 한계들을 모두 극복한다.
이 대중교통이 효율적인 이유는, 곤돌라가 2초에 한 번씩 오기 때문이다. 지하철처럼 배차간격을 고려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미니부스와 마찬가지로 내가 원할 때에 즉각적으로 탈 수 있다. 환승도무척이나 쉽다. 바로 옆에 다른 호선이 있을 때도 있고, 걸어서 5분이면 다른 호선쪽으로 갈 수도 있다. 9호선 환승에 지친 내겐 매우 만족스럽다. 빨리 빨리 문화가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매우 쾌감을 주는 대중교통이다.
또 하나 장점을 얹자면, 야경이 끝내준다. 누군가 볼리비아에 온다면 기필코 텔레페리코를 타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치 터키의 열기구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듯, 이곳에선 텔레페리코의 야경이 낭만을 선사해준다. 다닥다닥 붙은 주황빛 주택들, 가로등 불빛.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다 옆을 보면 금세 스치는 맞은편 텔레페리코들. 수많은 국가를 다녀본 나지만 이렇게나 낭만이 있는 곳은 처음이다. 영국의 런던아이가 프로포즈 명당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 유행에 대한 대안으로 텔레페리코 프로포즈를 제안한다.
덧붙이자면 보통 한국인 여행객들은 볼리비아에선 태양의섬, 티티카카호수, 우유니 사막만 가고 라파즈는 3~4시간만 머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라파즈에는 숨겨진 명당들이 많다. 우스갯소리로, 볼리비아의 관광청에 취업해서 텔레페리코 프로포즈를 상품화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악마의 어금니, 달의 계곡, 힙한 펍들, 댄스 파티, 국립미술관 등등... 한국인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관광지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