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으로부터 #5
<세상에서 가장 큰 보온밥솥>

by 페리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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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으로부터 #5

<세상에서 가장 큰 보온밥솥>


"이 보온밥솥을 아시나요?"


그 해 겨울은 꽤 길었다.

초등학교 시절 보온밥솥이 고장 난 적이 있었다.

보온밥솥? 고장 나면 사면되잖아 할텐데….

그때 우리집은 당장 보온밥솥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일 나가시기 전 밥을 넣어놓을 데가 없으니 해놓은 아침밥을

큰 스댕(스테인레스를 그렇게 불렀으니) 통에 넣어서 장롱 속 이불 사이에 넣어놓고 가셨다.

그렇게라도 보온이 되어 조금이라도 따뜻하라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장롱을 열고 이불 사이에 손을 넣어 동그란 스테인리스통에서 밥을 꺼내먹고

다시 넣어놓았다.

생각해보면 참 우울한 시절인데,

뭐랄까 그때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

내 기억 속 그 장롱은 재미난 공간이었다.

장롱 안은 이불로 전부 채워지지 않아 맨 위에 공간이 있었는데

가끔 장롱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겹겹의 이불 위에 올라가 있으면 그렇게 푹신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이럴 것 같은데!’

(그때까지 침대에 누워본 적이 없으니)


초등학교 저학년, 앞번호에 서는 작은 몸이 자신의 키만한 이불더미 위에 올라가 파묻히면 놀이기구 타는 것 마냥 즐거웠다. 거기다 장롱문을 닫으면 뭔가 아늑한 어둠속에 놓이게 되는데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타래들로 그 작은 공간에 들어찬 어둠은

암흑처럼 무서운 어둠이 아닌 마치 극장에 들어가 불 꺼진 순간처럼 설레는 따뜻한 어둠이라

이런저런 상상하기 딱 좋았다.

아무튼 그런 장롱이 이제 커다란 보온밥솥이 된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장롱을 열고 이불 사이로 손을 넣어 밥통을 꺼내는 그 일이 나는 재미있었다.

아주 일찍 꺼내먹는 날은 맨손으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고

저녁 즈음이 되면 미지근해졌던 동그랗고 커다란 스댕 통.

어리다고 가난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보온밥솥을 살 수 없을 정도의 형편이라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니까.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달달하게 덧칠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 우리 가족은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보온밥솥을 못 산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변한건 별로 없었으니까.

그건 어머니가 보여준 강인한 모습때문이기도 합니다.

'밥솥이 고장 났네-지금 밥솥을 살 수 없어-

-그럼 밥을 여기에다 둘 테니 꺼내먹어-그럼 우리는 당연하듯 꺼내먹고-'

이런 흐름으로 이어졌는데 우리 집의 고단한 일들은

이런 과정으로 늘 해결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기억은 지금의 나에게 고스란히 남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방법을 찾아 그냥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법.

무언가 있다가 없어졌을 때 잘 넘어가는 방법,

그것을 익히면 살아남는데 큰 도움이 된다.


겨울 내내

우리 집 장롱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보온밥솥이었다.


그 해 겨울은 꽤 길었고 그때의 기억은 내 안에서 오래도록 보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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