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의 깊이는 그저 무릎정도>
며칠전 아버지의 봉안당에 다녀왔다.
예전에는 선산에 있었고,
꽤 오랜시간이 지난후 봉안당에 모셨다.
큰 형이 이곳을 알아보았을때는 주변으로 빈 자리가 많이 있었는데
몇 달만에 그 빈 자리에 한분한분 슬픔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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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있었던 이태원 참사는 나에게 세월호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참사 자체도 그렇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이 마치 세월호의 판박이 같아 더욱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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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의 그 배는 제주에 도착하지 못했고
2022년 10월의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가을을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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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일상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전처럼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일도 했다.
하지만 회복되지 않을 사람들,
영원히 가라앉은 사람들과 영원히 가라앉을 사람들이 남았다.
예전 보라요정님의 가게는 삼청동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지나쳤다.
진실과 거짓이 섞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피곤하다 얘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돈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왜 다른 참사와 형평을 맞추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슬픔에 잠겨서 숨을 못 쉬는 사람들이 억울해서 밥을 끊으면
그 앞에서 낄낄거리며 음식을 먹는 자들이 생겼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들을 기어이 그 사람들 눈앞에 말로 글로 늘어놓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태원참사때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은 그런곳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 인간이라 부르기 싫은 자들이 넘쳐났다.
——
가까운 형님이 있었다.
내가 알던 사람 중에 가장 유쾌하고
가장 건강해 보였던 형님인데 안타깝게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시간이 꽤 지나 어느 모임에서 같이 알던 형님의 친구분을 뵌 적이 있다.
형님의 동갑내기 친구분이고 나보다 훨씬 가까운 분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돌아가신 형님 얘기가 나왔다.
형님과는 꽤 오래 알고 지냈으니 여러 가지 옛날 일들 얘기가 오고 갔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형님과 각자의 추억을 잊지 않고 나누다보니
모두 형님을 떠 올렸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
우리는 모두 언젠가 사라진다.
그리고 누군가 우리를 떠올리면 말 그대로 떠오른다.
나쁜 기억이라 가라앉히고 싶다면
떠올리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 앞에 가서
굳이 지겹다고, 가라앉으라고 사라지라고,
사회적 비용이, 정신적 피로니, 통합을 해치니 따위의
말은 하고 싶다면, 그냥 입을 닫았으면 좋겠다.
——
아직도 차갑고 깊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만큼 기억하고
떠올리고 싶은 만큼 떠올려서
제주로 가지 못한 배가,
10월에 멈춘 사람들이,
떠돌지 말고,
가라앉지 말고
각자의 가족들의 마음 안에 도착할 수 있길.
그래서 모두 떠오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