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책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 속 이야기나 비하인드를 연재합니다.
아마도 큰형의 초등학교(그 당시 국민학교) 졸업식이었지 싶습니다.
사진에서 제가 들고 있는 게 형이 받은 졸업장이고
목에 걸고 있는 게 학교에서 준 메달이었습니다.
뒤에 보이는 노란색 포니 픽업은 아버지의 차였고요.
아버지는 당시 작은 금성전자(지금의 엘지) 대리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게에서 배달도 가고 이래저래 사용하던 차가 바로 저 차였습니다.
뒤에 보이는 5층짜리 아파트는 당시 시영아파트였고
지금은 재개발되어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되었습니다.
십몇 년간 재개발 이슈 덕분에 집값이 미쳐 날뛰었는데(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어린 시절 기억나는 순간부터 20년 넘게 살았던 곳이라
익숙하고 정이 든 곳이지만 재개발되기 전에 우리 가족은 아파트를 팔고 경기도 광주로 이사했고,
그즈음부터 집 사정이 매우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정이 좋아지기 전, 그러니까 이사 가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나이 59세에.
그 후 작은형, 큰형이 결혼하면서 새 가족이 생겼고 조카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전에 돌아가셔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새로운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셨죠.
저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돌아가시기 1년 전쯤부터 가장 나빴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니 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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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사이가 그나마 조금 덜 삐걱대던 때,
제 지병 때문에 서울에서 용인까지 병원에 절 데리고 다니면서 가끔 지나치는
스쿠프나 투스카니 같은 스포츠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당시 문 두 개짜리 차는 다 스포츠카였으니까)를 보면 이런 얘기를 종종 했습니다.
“나중에 돈 벌어서 아빠가 저런 차 사줘야지. 젊었을 때 저런 차 타야 멋있는 거다.”
덜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그때도 그렇게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고
좋지 않은 집안 사정에 그 빈 깡통 같은 소리가 참 듣기 싫었습니다.
‘차는 무슨… 당신 삶이나 잘 살지!’
전 속으로 구시렁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샀습니다.
평생 차에 관심 없던 제가 처음 산 차는 문 두 개짜리 현대 투스카니였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미워하던 기억은 어느새 안타까움으로 변했고 안타까웠던 기억은 어느새 추억으로 반짝입니다.
아쉽다고 말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보고 싶다 생각해도 그냥 가슴에 묻어두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던 날 아침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때는 제가 몸이 아파서 방 밖으로 못 나가는 수준이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최악이었습니다.
거의 한 달간을 그 좁은 집에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지냈는데
그날 아침, 방문을 열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뭐 먹을 거라도 갖다 줄까?”였습니다.
아버지의 표정, 걸어가는 뒷모습.
저녁에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실려 가신 후 돌아가실 때까지
얼굴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하던 그때의 일이 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기억들.
사람은 종종 기억으로 살아남습니다.
아버지는 노란 차를 타고 가게에 나가기 전 매일 아침 100원씩 주셨습니다.
저는 매일 그걸 들고 아파트 뒤편 작은 구멍가게에 가서 어느 날은 깐돌이도 사 먹고
어느 날은 오락도 하고 어느 날은 쫀드기도 사 먹고 그랬던 일들이 모두 기억납니다.
아버지와의 나빴던 기억은 이제 다 희미해졌지만 좋았던 기억은 점점 더 생생해집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안타깝습니다.
가끔,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59세의 아버지가 아닌 늙으신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용돈도 드리고 싶고, 제가 차를 운전해서 어딘가로 모시고 가고도 싶습니다.
제가 그림 그리고 글 써서 책 냈다고 자랑도 하고 싶고.
저는 그때보다 돈도 더 잘 벌고 더 좋은 차도 생겼는데 말입니다.
시간이란… 어떤 기 억은
생생하게 조각해 놓고
어떤 기억은 흐릿하게 지워놓습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노란 차 뒤 짐칸에 올라앉아
하드를 하나 물고 동네를 느릿하게 돌던 저녁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제 기억에 가장 멋진 오픈카였고
가장 예쁜 저녁 풍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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