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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14. 2023

기생해야 산다

영화 <기생충>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포장하지만, 어쩌면 ‘기생하는 동물’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2019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이러한 논지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영화 속 ‘기택 가족’은 ‘박 사장 가족’을 속여 기생하기 시작한다. 물론 속이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지만, 그들은 엄연히 박 사장 가족을 만족시킬 실력이 있다.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서지 않고 기생한 까닭은 그들이 나태하거나 비겁하기 때문인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쉬운 방법으로 기생을 택한 것인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정의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다. 본래 그는 ‘인간은 정치적(폴리스적) 동물이다’라고 말했으나, 번역 과정에서 ‘사회적 동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정치적, 즉 ‘폴리스적’이라는 뜻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단위인 폴리스와 관련하여 사회적, 공동체적이라는 의미를 갖기에 맥락적으로 틀리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처음 나왔던 고대 그리스 때와 달리, 자본주의 체제 속에 있는 현재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문장이 전해주는 뉘앙스가 사뭇 달라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을 통한 자본 축적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경쟁에는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승자는 상위 계층에, 패자는 하위 계층에 자리 잡는다. 패자는 상승 이동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 자본주의의 주된 계층이동 수단은 자본인데,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보다 자본을 늘릴 수 있는 수단이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하위 계층이 자본을 획득하는 대표적 방법은 상위 계층의 노동자가 되는 것뿐인데, 그것 역시 어렵다. 상위 계층은 노동자가 된 하위 계층의 수고로 다시 자본을 축적한다. 결과적으로 계층이동은커녕, 빈익빈 부익부만 가속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위 계층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영화는 정답을 말해준다. 기생이다. 사회적 죽음을 겪지 않는 동물이 되기 위해서는 ‘기생하는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한순간의 실패로 반지하 생활을 하게 된 기택 가족 앞에는 생존으로서의 기생만이 남아 있었다. 곧 그들의 기생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숙주가 되는 박 사장 가족은 그들의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기우와 기정은 박 사장의 딸과 아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충숙은 급박한 순간에도 처음 만드는 채끝 짜파구리를 조리한다. 기택은 박 사장에게 코너링이 훌륭하다는 칭찬까지 듣는다. 이것은 기택 가족의 실패와 재기불능의 원인이 ‘무능’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기생하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박 사장 가족을 기만한 행위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만과 기생이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는 뻔하다. 만약 능력과 상관없이 패배자로서 영원히 머물러야 할 처지에 놓인다면, 누구라도 기택 가족처럼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박 사장 가족은 무엇이냐고, 그들은 피해받는 숙주의 입장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승패가 나뉘는 시스템이기에 승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소수인 것뿐이다. 또한 그들이 정말로 피해받는 입장 인지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상위 계층에 자리 잡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자본주의 시스템 속 상위 계층의 자본 축적은 대부분 하위 계층의 수고로 이루어진다. 그런 방식으로 부를 쌓는 모습은 기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자본을 늘리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생존으로서의 기생보다 더욱 기만적인 행위 같기도 하다.

 

  한편, 기택 가족의 무능이 실패와 재기불능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포로 만든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능력과 관계없이 갑작스러운 실패와 재기불능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 갑작스레 등장하는 근세의 삶을 기택은 끔찍하게 여겼지만, 기생충으로서의 속성은 다르지 않은 것처럼, 기택의 삶을 보는 관객의 삶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기택 가족의 기생 행위를 비판하기도, 감탄하기도 하며, 그들과 거리를 둔 채 관람했을 관객이, 자신과 그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 때, 영화가 주는 블랙 코미디의 쓴맛은 더욱 진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방식을 보여준 영화 <기생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원래 정의한 ‘정치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을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가진 현대 대한민국의 양극화, 승자 독식 사회와 교묘히 엮어내어 ‘기생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으로 재정의했다. ‘기생충’이라는 비하 섞인 듯한 제목은 어쩌면, 자신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 대중의 마음을 담아낸 것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기생에도 실력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기생충조차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생존으로서의 기생을 이어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기생해야만 하는 삶은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삶보다 더욱 부조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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