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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Apr 04. 2024

[에세이] 꽃 피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어느덧 밤공기마저 쨍한 차가움을 놓아줄 무렵이 되었고, 길에 드리운 가로수에는 벚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오늘 분명 비바람이 불었는데도 어느새 분홍빛 꽃들은 아름답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봄비는 다른 것인가 생각했다. 겨울에 내리는 송곳 같은 비와는 달리 그들을 적셔주고 품어주는 이 계절의 비는 어쩌면 하늘이 벚꽃에 허락하는 생명일까. 잠시 이런 생각을 한 채 휴대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어제 과제를 하다가 우연히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읽었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부모님이 늘 내게 해주던 북돋음의 원천은 그 문장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 문장을 빌려와 사람들을 위로한다. 더불어 나 스스로에게도 읊어준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정말로 말에는 힘이 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몸과 마음이 지쳤어도, 이 문장을 떠올린다면 알 수 없는 미소가 내 얼굴에 번진다. 씁쓸함과 당참이 오묘하게 혼재한 미소를 지은 나는 하루 더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언젠가 이 흔들림이 끝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반드시 꽃잎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고서.


 물론 여전히 시련은 몰아친다. 어제 날이 따뜻했었는데 오늘 비바람이 불어와서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방심할 수 없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항상 나는 지레 겁먹은 상태였다. 비를 동반한 돌풍이 갑작스레 찾아와서 흔들리다 못해 꺾어 버릴까 봐, 무겁고 축축한 비에 젖어 꽃봉오리를 열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그러던 중 오늘 방문한 어느 도로 모퉁이 베이커리 화장실에서 우연히 한 글귀를 보았다. ‘내일은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날이다.’ 나는 잠시 그 글귀를 묵상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단순하고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은 내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게 했다. 그래, 아직 맞이하지 않은 비바람에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것과 더불어 최근 내게 힘을 준 것은 어느 교수의 말이었다. 현직 소설가인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소설 쓰려고 고작 삼일 밤새우는 게 대수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봤어? 그랬는데도 정말 안 되어서 신을 저주하는 지경까지 가 봤어?’ 등등…. 어쩌면 그것은 내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교수의 진실한 목소리에 나는 자각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소설을 쓰는 것임을. 소설에 대한 투지를 그 지경까지 끌어올려서 온몸을 그 속에 던져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물론 그 끝에 피어나는 것이 봄꽃일지는 장담치 못한다. 어쩌면 불나방처럼 불꽃의 연소 재료 따위로 끝날 수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하겠다. 되든 안 되든 미련 남지 않도록 부닥치고 싶다. 그 결과가 봄꽃이든 불꽃이든, 피어나는 과정은 아름다움으로 남을 테니까. 니체의 말을 빌려 오자면, 나를 꺾지 못하는 흔들림은 나를 꽃피우게 만들 테니까. 그날을 소망하며 흔들림을 버틸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사진을 찍는 도중 문뜩 이러한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마주친 벚꽃잎의 분홍빛이 유독 진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언제까지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밤만큼은 그 어떤 하늘의 별보다도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했다. 아쉽게도 내가 찍은 사진 속 벚꽃은 실물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그저 두 눈에 이것을 담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바람이 불었고, 벚꽃 잎 하나가 어깨 위로 살포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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