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Aug 29. 2023

귤과 헛간, 그리고 존재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메타포란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을 뜻한다. 차분하지만 주관적인 어조로 전개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서는 위 기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본 글에서는 소설 속 은유적으로 등장하는 두 가지 상징을 찾고, 그것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해보려 한다.




 1. 귤껍질 까기

 ‘귤껍질 까기’는 ‘그녀’가 팬터마임 수업에서 배운 것이다. 상상 속의 귤을 하나 들고 천천히 껍질을 벗겨, 한 알씩 입에 넣고 씹다가 찌꺼기를 뱉어내고, 한 개를 다 먹으면 찌꺼기를 모아서 껍질로 싸서 오른쪽 통에 넣는 행동이다. 귤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의 부재를 망각하는 것,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 팬터마임은 ‘사물을 판단하기 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설가의 세계관(‘나’의 세계관)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한다. ‘나’는 ‘귤껍질 까기’ 속 귤이 존재하는지, 혹은 부재하는지 판단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귤껍질 까기’는 실존(實存)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인지, 부재(不在)란 무엇인지, 그 둘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지를 ‘나’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생각하게 한다.


 2. 방화

 이후 ‘나’는 ‘그’의 등장과 함께 그러한 상황에 다시 처한다. ‘그’가 말한 ‘헛간 방화’는 ‘귤껍질 까기’와 같은 맥락이다. ‘그’는 판단하지 않으며,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헛간을 태울 뿐이라고 했다.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헛간은 무엇일까? 우선, 무엇이 헛간을 헛간으로 존재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자. 벽, 기둥, 지붕 등의 물리적인 것인가? 혹은 그것의 필요성인가? 헛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무언가를 찾았다면, 이제는 헛간이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존재의 본질이 사라진 헛간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본질을 잃은 헛간은 부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면, ‘그’의 ‘헛간 방화’는 헛간의 부재를 인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헛간이 쓸모없다’라는 판단이 아니다. 따라서 도덕을 헤치지 않는다. 본질을 인정해 주는 것은 오히려 도덕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이다.


 이 논리는 무척 그럴듯하지만, 헛간의 부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그’ 자신의 방화를 정당화하려는 궤변에 불과하다. 결국 ‘그’가 헛간의 본질과 존재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귤껍질 까기’를 처음 보았을 때 마주했던 느낌을 다시 받는다. 그리고 ‘헛간 방화’는 ‘나’의 실존에 대한 관점에 큰 영향을 준다. 소설의 종결부, 불에 무너지는 헛간을 계속 생각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3. 중첩

 한편, 독자는 ‘그’가 사람을 헛간에 비유해서 말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냥 스스로 사라진 것이고, ‘헛간 방화’는 ‘그’의 생각 속에서만 행해졌을 수도 있다. 방화가 생각에 불과하더라도 ‘그’가 헛간을 실존한다고 판단했다면, ‘그’의 세계관에서 헛간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에게 ‘그’가 불태운 헛간은 ‘동시적 존재’가 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존재가 부재가 중첩된 상태.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상자를 열어야 할 ‘나’ 뿐이다. 독자 역시 ‘나’와 같은 상황에서 존재에 관한 판단을 요구받는다. 독자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모호하고 열린 서사 종결도, 분명하고 확실한 서사 종결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귤껍질 까기’와 ‘헛간 방화’, 두 메타포를 분석해 보았다. <헛간을 태우다>는 결국 실존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말한다. 이것이 우주의 구조를 뒤집는 행위 같아도, 자기 몸을 조각조각 내는 것 같아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껍질 까고 있는 귤이 실존하는 귤인지를, 불에 타고 있는 헛간 속에 정말 헛간이 실존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 운전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