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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ya Oct 12. 2023

고독과 사랑의 멀티태스킹

페퍼로니와 하와이안 피자 같은 것 

페퍼로니와 하와이안 피자 같은 것.

일요일의 조천읍에는 비가 잔뜩 내립니다. 


토요일은 조금 늑장을 부렸습니다. 계획했던 한라산 등반이 물거품이 되자 조금 힘이 빠진 탓입니다. 오전 11시, 날씨가 갠지라 이불을 털고 환기를 시켰습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숨은 봄을 내어줄 생각이 없다 말합니다. 청소기의 소음이 음악 소리를 덮습니다. 커피를 내리고, 오늘 할 것들을 정리해 봅니다. 오후엔 근처의 오름을 갈까 하다가 며칠 후 지인이 오면 그때 함께 겸사겸사 나가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비밀의 숲으로 향했습니다. 하늘을 찌를듯한 비자나무들이 가득 찬 숲입니다. 비닐로 감싼 샌드위치, 에너지 바, 사과 맛 젤리는 굳이 필요치 않은 트래킹 조끼에 담겼습니다. 꿀렁이는 흙 길을 지나 초원이 펼쳐졌을 때, 도착지의 300미터를 남겨두고 차를 세웠습니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볼멘소리를 뱉어냈겠지만, 혼자인 나는 만장일치의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조용히 걷는 들판, 숲은 궂은 날씨임에도 아름다운 위압감을 주었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문득 아침에 끄적였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오늘 들어올 때는 꼭 원두를 사 와야지.” 


나는 무언가를 한꺼번에, 나가는 김에, 그거 하면서 중간에. 여러 가지를 해치우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손에 잡히는 책을 읽다가, 장 볼 리스트를 끄적이고, 쇼츠를 보다가도 오늘 뜬 브랜드의 룩북을 보고,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장면과 생각들을 한 줄로 쓰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두 한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언젠가 인간은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멀티태스킹의 미신(the myth of multitasking)이라는 책에서는 멀티태스킹은 사실상 스위치 태스킹(switch-tasking)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듯, 순간마다 하나의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오래된 스위치가 고장 나듯, 멀티태스킹도 비슷한 페이오프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멀티태스킹을 자주, 오래 할수록 기억력 및 집중력의 저하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멀티태스킹은 대부분의 남녀가 겪는 육체적인 관계에서 흥미롭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고 낭만적인 관계를 상상하지만 이는 곧 통제불능감에 빠져버립니다. 손의 감각에 집중하니 어느덧 나누던 키스는 느리고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합니다. 바삐 움직이는 손, 멈춰버린 입술, 어색한 움직임, … 그녀는 배에 힘을 주고, 그는 거북한 신음을 가다듬기도 합니다. 오늘은 실격입니다. 어쩌면 육체적 관계란 날고 기는 멀티테스커들의 최종 시험대 같습니다. 







일요일의 아침은 일찍부터 비가 쏟아집니다. 자연에 한없이 작아진 나와, 그런 내가 그려둔 계획들은 모두 물에 젖은 교과서가 되어 펼쳐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득 제주에서의 고독이 꽤나 흘렀음을 느낍니다. Should have pp(~할걸, 그랬으면 좋으련만)이라 부르는 후회 영어가 끊임없이 쏟아집니다. 만기 출소하는 복역자처럼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을 입습니다. 오랜 후배가 직원으로 있는 수제맥주집, 맥파이를 가기로 합니다. 하루의 또 다른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쓰면 삼키고 달면 뱉는다


빗길을 뚫고 맥파이에 도착했습니다. 고독으로부터 꼬박 40분을 도망쳐 왔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이라 넓은 공간은 다소 한산합니다. 점원의 추천을 받아 IPA를 주문하였습니다. 항상 라거를 좋아한다고 믿어왔던 나는 수제 IPA 한 잔에 백기를 듭니다. 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지만 이런 술이라면 사랑해도 좋을 기분입니다. IPA에 만족한 나를 보던 점원은 더블 IPA를 추천합니다. 도수와 IBU(쓴맛의 정도)를 두 배로 올린 맥주입니다. 재치 있는 이름도 한몫을 톡톡히 합니다. '쓰면 삼키고 달면 뱉는다'. 감탄고토(甘呑苦吐)가 아닌 고탄감토(苦呑甘吐)입니다. 이 술은 어쨌거나 제가 제일 사랑하는 맥주가 되었습니다. 풍부한 맥주의 향과 높은 도수를 원한다면 시도해 보기를 권합니다.  


일 년째 맥파이에서 일을 하던 민석이를 만났습니다. 페퍼로니와 하와이안을 고민하던 나를 보더니, 메뉴에 없던 반반 피자를 내주었습니다. 잘 구워진 피자를 보니 괜스레 민석이가 대견해 보입니다. 현재 가슴으로 다가온 것들은 과거의 작은 시작이며, 꿈틀거림입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그가 해를 거쳐 주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근사한 피자도 굽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름 냄새가 밴 티 위로 헐렁한 앞치마를 두르고 맥주를 빼먹습니다. 그런 쿨한 삶도 있습니다. 







모쪼록 사랑입니다. 


애매하게 남은 두 조각과, 넉넉히 담은 두 소스는 사랑입니다. 

고독으로부터 도망쳐온 나는 두 조각과 함께 집으로 돌아갑니다. 


페퍼로니와 하와이안

하나의 고독과 하나의 사랑 같은 밤


시킬 수 없는 반반 피자와 같은 두 감정이란 

동시엔 얻을 수 없는 멀티태스킹의 미신이지만

그럼에도 그 밤엔 두 조각을 함께 챙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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