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뜸 여자친구가 번호를 따였단다.
식당에서 웬 남자가 걸어와서는 예쁘다며 번호를 달라했다나.
요새는 번호 말고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본다나.
"나 아직 죽지 않았다니까~"
- "아 그래? 팔로우했어?"
가끔 어떻게 대답하는 게 맞는지 모를 질문들이 있다.
결국 저런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했다.
여자친구가 번호를 따인 것이 기분 나쁜 일일까?
그런 그렇고 이걸 왜 나한테 전할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쏟아진다.
그 바람에 교과서적 답변은 뒷전이 되었다.
암튼 내 대답은 참 꽝이었다.
변명하자면, 으레 한국 남자들은 그놈의 미디어 사랑꾼들의 피해자다. 물론 감동적인 대답은 항상 존재한다. 나도 가끔 어떤 대답을 보고는 감탄하니까. 그렇다고 지극히 일반적인 남자의 대답이 비난받을 짓은 아니지 않은가.
"묶은 머리가 어울려, 푼 머리가 어울려?"
이 질문은 이젠 모든 남자들의 오답노트를 거쳐갔다.
다들 알겠지만, 어울리는 각각의 상황을 찾고 설명해줘야 한다. 푼 머리와 묶은 머리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며 미간을 찌푸려 고민하는 척도 필수다.
다시 번호를 따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A 친구도 며칠 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알바 도중 단골 손님이 여자친구에게 번호를 물어봤단다. 한 번 지나가듯 얘기하면 될 것을, 몇 번이나 번호 따인 썰을 풀었다고 한다.
내 친구는 나와 달리 질투심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물론 여자는 질투를 바랐던 것 같다. 바랬다는 걸 간파하면 더 해주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다! 어쩌면 별로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B친구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다. 여자친구가 번호를 따이면 너무 좋단다. 이유는 즉슨, 그렇게 예쁜 여자와 나는 연애를 하고 있으니까! 이것 참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럴게 꽤나 바이럴 된 비슷한 영상을 봤다. 여자친구가 평소 옷을 야하게 입든, 남들이 쳐다보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나. 왜냐고? 그래봤자 그 여자와 집에 함께 들어갈 남자는 자기란다. (흥, 집은 너랑 들어가고 호텔은 걔랑 들어가면 어쩌려고?)
내가 이런 말 하면 나를 자존감 바닥인 루저로 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건 자존감의 영역을 벗어났다. 나에게 연애는 적당한 구속이 동반되는 관계이다. 쿨내 풀풀 풍긴답시고, 여자친구가 남자랑 밤새 술을 마시든, 야한 옷을 입고 클럽을 가든, 인스타에 모르는 남자들이 쌓이든 다 이해해 줄 작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걔랑 사귀는 건 넌데 왜 걱정을 하냐고? 다른 남자가 내 여자친구를 보고 헐떡이는 게 싫을 수 있지 않나? 적어도 그걸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게 나에겐 정상적 사고이다. 그 친구의 자유니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그대의 오픈 마인드에 박수를 쳐드린다. 그렇다고 날 쫌생이 선비로 몰진 말아 달라. 세상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으니까.
소신발언 하자면, 진짜 신경 안 쓰다가 바람 당하기 일쑤더라. "그럼 다행이다 걸러져서!"라고 생각하라는데, 나에겐 이만한 정신승리도 없다.
뭐가 되었든 서로 잘 맞고 좋으면 남들의 의견은 그리 중요치 않다. 누가 이해하지 못한들 어떤가. 둘이 똥을 쳐발하며 섹스를 하든, 다부다처제로 만나든, 서로 클럽을 다니든 제 3자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될 일이다.
만약 충분한 대화 후에도 가치관이 안 맞다면 그냥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맞을까? 어떻게든 자신의 신념이 맞다 우기며 바꾸려고 드는 건 분명히 한계가 있다. 서로 더욱 상처 주지 않기로 하자.
결국은 신뢰다. 여자친구가 번호를 따이든, 얘가 그것에 홀라당 번호를 주거나, 인스타 아이디를 가르쳐주거나, 연락을 이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면 나도 저 쿨내 넘치는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다.
"어우 야야 안 되겠어 이렇게 입히면 너무 예뻐서 동네 사람 다 번호 따겠어 어쩜. 너 앞으로 그지 같이하고 다녀 지지배야. 머리도 감지 말고, 화장도 대충 하고, 돋보기안경 쓰고 다녀"
이 호들갑과 질투가 적절히 섞인 대답을 찾는 데는 꽤나 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