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
연애를 8년 하고 결혼을 한 뒤, 나는 아이가 갖고 싶었다. 신혼생활도 재미있었지만 뭔가 지루하고 허전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랑의 결실이 아이라 생각했고 그러면 우리는 더 완벽한 가족일 될 것 같았다. 순전히 내 착각이었지만...
나는 아이를 원한다고 이야기했고,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별다른 의견은 없었다. 반대하지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도 않았다. "글쎄, 잘 모르겠네."라는 답변만 돌아왔을 뿐. 우리는 피임을 하지 않기 시작했고, 정말 축복처럼 201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우리에게 첫째 아이가 왔다. 축하 꽃다발과 전화를 수차례 받고 행복하게 엄마가 되는 준비를 했다. 그리고 2014년 남편은 대구로 발령이 났다. 주말부부가 시작된 것이다.
입덧이 심하지도 않았고 붓기가 심한 것도 아니었다. 임신하는 동안에는 별다른 힘든 점은 없었다. 참고로 내 주특기는 '참기', '인내하기', '견디기'이다. 단지 함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남편이 옆에 없었고 모든 것은 나 혼자 준비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홀로 엄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원한 아이였고, 남편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위기는 아이를 낳고 난 뒤 시작했다. 정말로 두려웠던 출산의 고통이 지난 후, 이제 힘든 것은 다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름 아이를 낳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글로 배웠기에 이제 엄마로서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고통은, 배운 데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는 통 잠을 못 잤다. 30분 이상을 잠들지 못했다. 잠을 못 자니 예민해서 먹는 것도 어려웠다. 백일이 되어 가는데 1kg 밖에 몸무게가 늘지 않았다. 나는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항상 안고 있었다. 그렇게 안고 있는 동안 아이는 잠을 잤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잠을 잘 못 잤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었던 모유수유만을 고집했다. 첫 번째 모유수유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아이는 못 먹는데 나는 젖이 가슴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항상 유선염을 달고 살았다. 마사지받으러 다닌 것만 수십 차례. 통곡 마사지해주시던 선생님과 베프가 됐다. 그래도 심해져서 산부인과를 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꾸만 시달리는 유선염 때문에 밀가루와 고기도 끊고 정말 다이어터의 삶을 살았다.
수면 부족. 항상 아이를 안고 있었기에 손목도 항상 아팠다. 하지만 모유수유 때문에 약도 못 먹었다. 모유수유 때문에 밀가루와 고기도 먹지 않았다. 나는 정말 정말 예민해져 갔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남편의 전화를 기다렸다. 대구 생활에 적응하기 바쁜지 전화를 하지 않은 날들이 많아졌다. 내가 전화하면 회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떠들썩한 맥주집에서 맛있는 것들을 먹으며 전화를 받고 있을 남편이 상상되었다. 나는 지옥이었는데, 남편은 나 홀로 라이프를 완벽하게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되는 노력을 아등바등하는데, 남편은 아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힘든데, 남편은 행복한 것 같았다. 어차피 혼자 키울 아이라면 이혼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밤새 아이를 안고 차장밖에 수많은 교회 십자가를 세어보며, 이혼에 대해 고민했다. 내가 왜 이혼을 하고 싶은지, 우린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난 완벽한 엄마가 되는 것은 놓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무한정 늘어났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은 시들어 갔다. 만약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아이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갔고, 나는 남편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졌다. 오직 내가 이혼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시뮬레이션만 머릿속에서 돌고 또 돌았다.
백일이 지나고, 돌이 지나고,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조금씩 사람다워지며 육체적인 힘듦은 조금씩 줄어든다. 밤새 잠도 자고, 외출할 때 짐도 줄고, 내가 먹는 걸 함께 먹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씩 공유할 수 있다. 남편에게 맡겨도 안심이 되는 나이가 되면서 나는 토요일 오전마다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말 부부였기에 평일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집 밖을 나와 황금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reset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치유와 회복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힘을 얻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나는 조금씩 내 삶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둘째를 꿈꾸게 되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동생이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행이나 뮤지컬/콘서트를 갈 때 가장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내 동생이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동생은 핫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같이 있으면 재미났다. 물론 우리도 자라는 동안에는 엄청 싸웠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니 친구들보다 동생과 함께 있는 시간이 재밌고 편안했다. 내 딸에게도 그런 동생이 생겼으면 했다.
아이가 30개월 즈음됐을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모가 돌아가시는 일은 생에 겪을 큰 슬픔이다. 당황스럽고 슬프고 절망적인 이 순간, 동생들이 있어서 힘이 났다. 난 동생이 둘이다. 아이가 생기고 나니, 자연스럽게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내 아이는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니 둘째가 생겼으면 했다.
그리고 둘째를 갖기로 했다.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내 의견을 따른다고 했다. 그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둘째 때는 내가 확고했기에 남편이 정확하게 원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어렵게 둘째가 생겼다. 그리고 5월 둘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나의 결혼생활은 또 한 번의 위기가 왔다.
첫아이를 낳은 후, 이혼을 생각하고.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이혼을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방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