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혼을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소망했던 결혼생활은 '함께'하는 삶이었다. 신혼 때는 '함께'의 의미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쇼핑도 함께, 영화도 함께, 뮤지컬도 함께, 콘서트도 함께.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고, 모든 것을 공유하기에 남편은 흥미도 여유도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의 삶도 필요하고 '함께'하는 교집합도 필요한 것 같다. 대표적인 교집합이 육아가 되길 원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내 삶은 온전히 육아 100% 였고 그 길을 남편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문제는 해결된다. 시간이 지나 아이는 자라고 힘든 시기는 조금씩 지나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을 뒤돌아 보면 나는 진흙탕을 걸어왔고 남편은 아스팔트 위에서 전동 킥보드를 타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 느낌이 나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우리는 함께하는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이라 해서 내가 원하는 결혼생활이 계속될 것 같지 않았다. 삶에 어떤 위기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육아였지만 그다음에 올 위기가 무엇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럼 그 위기가 또 온다면 우리는 이렇게 또 다른 길을 걷겠지. 이런 결혼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결혼 생활을 왜 유지해야 하는가? 결혼이 어떤 의미인가? 왜 결혼을 해야 하는가? 사회적 결혼의 의미가 출산을 위해서라면 우리들의 결혼은 그 의미를 다했다. 나는 더 이상의 출산을 할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그 결혼생활을 끝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사회에서 정의한 결혼의 의미가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 삶인데 내가 살고 싶은데로 살면 안 되는 것인가?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럼 이혼이 답이네. 이혼이 지닌 사회적 부정적인 의미를 그냥 무시하고 이성적으로 보면, 굳이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의미가 있나?
이혼 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내가 복직해서 돈을 벌면 가능할 것 같다. 어차피 지금도 혼자 육아/가사를 도맡고 있으니 남편이 없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혼자라는 것을 빌미로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건네 보자 생각했다. 엄마는 항상 대환영이었다. 엄마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인내가 강하셔서 항상 원하셨다. 내가 선을 그었지만.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낸 후,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와 씻고 정리하고 잠드는 일상이 계속될 것이다. 주말에 하루는 아빠와 함께 보내면 내 시간이 생겨서 숨통이 트일 것도 같다. 남편과 미워하는 관계로 남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이혼을 하고 나면 굳이 미워할 이유가 있을까.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쿨내 진동하는 관계로 남고 싶었다.
그런데 유교국 대한민국에서 아빠 없는 아이로 잘 키울 수 있을까? 나에게 돌아오는 편견은 내가 감당하면 되지만 아이에게 향해진 화살을 내가 다 막을 수 있을까? 나의 선택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면? 아이에게 아빠를 빼앗은 것은 엄마인 내가 되는 것일까? 한편으로 나는 자신 있었다. 세상에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존재하고, 그게 너의 잘못이 아니기에 문제는 없다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맞벌이 부모에 대한 편견, 편부모 가정 혹은 부모 없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직접 들을 때면 가슴이 묵직해지면서 두려워졌다.
결국 나는 그냥 참고 사는 것을 택했다. 그때는 무섭고 두려웠다. 나는 굉장히 신중하고 안정적인 이 삶에서 변화를 원하지 않은 보수적인 사람인 것 같다.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 혼자 살겠다고 아이에게 아빠를 빼앗겠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남았다. 정말 많은 생각 끝 결론은, 부부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보자였다. 셰어하우스에서 사는 것처럼. 어차피 혼자 해야 할 육아/가사 노동이라면 그건 이혼을 하던 안 하던 같을 것이다. 그저 하나의 집을 셰어 하는 룸메이트라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내가 정한 부부의 모습 때문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함께하는 그런 부부의 삶. 육아를 시작하면서 '함께'라는 느낌은 기쁠 때뿐이었다. 슬프고 힘들 때 옆에 없던 남편은 더 이상 나의 미래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부부에 대한 의미는 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아이를 원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뱃속에 열 달 동안 함께한 사람은 나고, 남편에게 이 아이는 갑자기 생긴 당황스러운 존재일 것 같기도 했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그 역할을 종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남편에게는 짜증을 내며 이야기를 하던 내가 지나가던 행인이 건 말에 상냥하게 대답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남편은 내가 씌운/혹은 사회가 씌운 가정이라는 프레임에서 가장 나쁜 놈이었고, 나에게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함께'하지 못하는 삶. 그게 나에게는 가장 큰 이혼의 이유였다. 그럼 그 프레임을 지우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사람은 나에게 그저 룸메이트일 뿐이다. 집을 함께 나눠 쓰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니 이혼과 다를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제도에 얽매여 결혼과 이혼의 의미를 두지 말고, 나 홀로 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남편과는 적당히 선을 긋고 내가 하고픈 방향대로 가족을 만들어 보자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들 목욕할 때 도와주는 남편이, 내가 잠시 볼일 볼 때 집에서 아이들을 봐주는 남편이 조금씩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과 관련된 일들, 남편의 가족들의 만나는 일들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웬만하며 비켜갔다. 어차피 각자의 행복을 찾아 사는 삶 아닌가. 이혼도 결심한 마당에 내가 남편의 일에 관여할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견뎠다. 버텼다. 의미 없는 결혼생활이 지속되는 것 같았다. 함께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난 철저히 혼자였다. 두 아이를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았다. 이건 오직 나의 정신적 건강을 위한 임시방편 해결이지, 정답은 아니다. 힘든 시간에 아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나의 행복을 위해 잠시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방안이다. 이혼하면 어차피 혼자 해야 할 삶이다. 아이들을 키우고자 하는 욕망은 내가 더 강하다. 홀로 두 아이와 함께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룸메이트 남편이 있는 것이 어쩌면 덜 힘들었을 삶이 아닐까. 룸메이트가 꼬박꼬박 월급을 벌어다 주니 그 얼마나 기특한 존재인가. 그렇게 나를 달래고 어르며 도를 쌓는 삶을 시작했다. 어쩌면 나만의 버티는 방법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부부'의 의미를 바꾸었을 뿐인데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독립을 하고 나면 그 이후의 우리의 관계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야지. 하지만 마냥 남편과 대면대면 지냈던 것은 아니다. 변화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은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