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좋아지고 있다.
사회생활 시작할 때만 해도 육아휴직을 1년 쓰는 것은 다른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다. 다행히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1년의 휴직은 너무나 흔한 이야기였다. 물론 복귀 후 많은 논란이 있어 마냥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육아휴직을 못쓰게 해서 그만둔 여성 리더의 이야기, 승진/고과에서 어쩔 수 없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주위에서 많이 들려왔다. 운이 좋게 내가 육아휴직을 내는 그 해부터 모성 보호대상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한 달에 4시간 검진휴가가 생기고 6개월 이상 육아휴직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최저 고과 B를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이름부터 맘에 안 든다. 모(母)성보호. 육아는 엄마만의 것인가?
워킹망에게 두 번의 시련이 찾아온다고 한다. 아이를 낳았을 때 한번, 아이가 학교에 갈 때 한 번. 아이를 낳고는 내가 육아휴직을 썼으니 학교 갈 때는 남편에게 육아휴직을 필요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했다. 나의 불만이 양성 불평등에서 오는 만큼 양성평등에 관한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남편에게 보내줬다. 물론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첨언을 붙였다.
'우리 딸이 어른이 됐을 때는 이런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스웨덴으로 이민 가자. 우리 아이들을 여기서 키울 수는 없겠어.'
'정치인들은 뭐하니. 이런 법 안 바꾸고. 돈 받고 일은 제대로 한다니?'
대화의 주제가 다르지만 우리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는 '스웨덴 라테 파파라고 알아? 내가 엄마들끼리 만나서 스트레스 풀듯, 육아하는 아빠들끼리 모임도 갖고 공유도 하고 그런데. 진짜 멋지지 않니?' 하면 우리 신랑은 '와~ 여기 이번에 스타필드 들어간데. 얼마나 큰 규모인지 알아? 앞으로 여기가 좋아지겠어' 하며 부동산 재테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그렇게라도 우리는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남편이 처음으로 가전제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로 무선청소기. 희한하게 비싼 가전제품을 출시할수록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우리에겐 이미 유선청소기가 있었고, 나는 사실 청소기보다 앉아서 물걸레로 닦는 것이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새벽처럼 일어나서 물걸레질을 하시던 엄마를 보고 자라서일까. 하지만 구입했다. 무선 청소기를 구입하고 나서 남편은 신기한지 계속 시험 삼아 청소를 했다. 그리고 성능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생전 걸레 한번 빨아본 적이 없는 남편이 무선청소기로 물걸레 청소를 한 후 걸레를 빨아 널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식기세척기. 이건 더 거금이 들어갔다. 주방 공사하는데 무선청소기 반값이 지출되었다. 식기세척기는 더욱 비쌌다. 그래도 구입했다. 그 이후 설거지는 남편 몫이 되었다. 아직까지 뒷정리가 말끔하지는 않지만 뒷정리는 내가 조금 더 하면 된다. 그러고 나면 남편이 다음 설거지할 때는 뒷정리가 조금 더 나아지곤 했다.
양성평등을 위해 돈을 투자했다.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물론 돈만 투자한 건 아니다. 내 눈높이를 남편과 맞추었다. 결혼해서 생활패턴은 모두 상대적이다. 둘이 함께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예민하고 깔끔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집안일에 관해서는 내가 조금 더 깔끔하고 부지런했다. 그래서 남편이 한 집안일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절대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더러우면 더러운 데로 정리가 안되면 안 되는 데로 내가 맞추어 생활했다. 그래야 온전히 남편에게 집안일은 배분해 줄 수가 있다.
회사일로 치면 이런 것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회의를 통해 업무를 나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가이드라인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준다. 그럼 나는 나대로 업무를 하면서 가이드라인 알려주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대방도 다른 방식이 많지만 내가 알려준 가이드라인대로만 진행하다 보면, 절대로 일하는 능력이 늘지 않는다. 몇몇 동료 중에는 웬 간섭이냐며 치를 떠는 사람들도 있다. 절대 관계가 좋을 수가 없다. 좋다 하더라도 내 업무가 줄지 않기 때문에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을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해야 업무 능력이 는다. 그래서 남편의 방식대로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았다. 결과가 좀 나쁠지라도 이번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고 독려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본인 프로젝트(집안일)에 정을 붙이고 계속해 나갈 수가 있다.
사회제도를 직접 내가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것은 정말 오래 걸린다. 하지만 우리 집 안에서 만큼은 보다 쉽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물론 남편이 동의를 해줘야 가능한 일이다. 양성평등을 머리로 배운 우리 세대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실천하기까지가 어렵다.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함께 조율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사회제도도 변화하고 있다. 이 분위기로 나는 조금 더 우리 집 양성평등을 위해 밀어붙일 예정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다. 2021년 큰아이가 초등학생이 된다. 드디어 남편이 육아 휴직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