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장례문화
아침 찬 공기에 교무실도 썰렁했다.
일찍 오신 몇 분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트마 선생님은 학교에 오지 않을거라 이야기해 주셨다.
한국어를 가르치며 저의 이야기를 통역해주시는 선생님이 오늘 못오시면 그 수업을 내가 대신하여 들어가야하는 경우가 있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쉴 틈없이 수업으로 채워지는 날은 파김치가 되는 날이 되기 때문이었다.
얼마전 나와 의견이 안맞는 장 샘과의 대화에 불똥이 젊은 바트마 선생님에게 튀어 내가 오히려 사과했다. 많은 사람이 장샘의 괄괄한 성격을 알기에 다른 분들은 아무말 못하였다. 그 분위기에 내가 치고 박으니 위, 아래, 물, 불을 안가리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꼬치꼬치 본인의 화냄의 이유를 거친 숨소리로 말했다. 말이라 표현했지만 싸움이었다. 나또한 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그러지 마시라 표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안되어 바트마 샘이 출근을 안했기에 내가 더 미안했다.
첫 수업전 교감 선생님은 낮은 목소리로 바트마 샘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오늘 수업을 한국어과 선생님들이 대신 해주길 원하셨다. 또한 오후에 빈소에 선생님들이 방문하자고 하였다.
한국에서처럼 따로 장례식장이 있지는 않았다. 가정집에 초가 켜져 있었고, 오래전부터 병치레를 했었는데 아침에 아버지가 안일어나셨다고.. 음식을 내어주는데 보츠와 샐러드다. 오신 손님들에게 그렇게 대접을 하였다. 함께 온 선생님들은 젊은 바트마 샘에게 아무런 말 없이 눈으로 이야기 하였다. 몽골에서 첫 상가집 방문이라 사진을 찍기도 그렇고 어떤 말을 해야 위로를 해야할지 망설이다 아무말을 하지 못했다. 같은 여자였다면 안아주기라도 했을텐데 그렇게도 못했다.
작은 아파트안에 초 두개가 켜져있었고, 식탁이 없어 접시를 손으로 들고 먹고 있었다. 의자가 없어 급하게 준비했는지 플라스틱 의자에 상표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집 곳곳에 달라이 라마 사진, 문 위에는 부적이 있었지만 여느 가정처럼 깊은 불심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5일장이고, 이렇게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장례가 마쳐지면 식당에서 상주가 감사의 의미로 또 음식을 대접한다고 했다. 장지는 공동묘지인데 울란바타르에는 현재 더 이상 매장을 할 수 없어서, 시내에서 20키로 정도 떨어진 날라흐 공동묘지로 가야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풍장이라고 해서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넓은 초원에 시신을 두어 자연과 하나가 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중(람-스님)들이 장례를 집례하고 요즘은 기독교 영향으로 상주나 가족 중에 신앙이 있다면 목사들이 집례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바트마 선생님은 일주일이 지난 후 학교로 복귀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해하는 시간이 일주일 밖에 안되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돌아온 선생님이 괜시리 안스러웠다. 공강시간에 어떠냐고 했더니 밝은 표정이 갑자기 끝없는 울음을 보였다. 괜히 내가. 감정을 추스르는 과정인데, 내가 다시 건드린것이다. 일부러 그런 표정 안보이려고 애썼나보다. 한참 화장실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