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다웅, 이 순간을 음미하자
영화 〈이터널 선샤인〉 "01:24:31"
유난히 자주 투닥거렸던 연말이 지나갔다. 새해의 첫 금요일에는 모처럼 전시회에 가기로 했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너를 만났다. 밝아 보이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둘 사이에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맴돌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너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것인지, 상했다면 왜 상한 건지, 따져 물어도 대꾸해주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짧지만 괴로운 시간이었다. 두툼한 패딩 점퍼를 껴입은 옷차림만큼 속이 답답했다.
눈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모자란 데이트 비용 때문에 한창 골치 아파하던 시절이라, 눈치를 보며 둘 다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평소 같으면 웃음이 터졌을 상황인데도 우리는 굳은 표정을 하고 커피숍 구석으로 가 앉았다.
너는 가지고 있던 감정을 뒤늦게 말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얼굴은 붉어지고 언성은 높아졌다. 땔감을 삼킨 불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던 감정은 끝내 눈물의 형상으로 터져 나왔다. 글썽이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너는 분하고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였다.
네게 맞선 나는 반대로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우는 너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만 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 테이블에 놓인 커피 두 잔도 금세 식어버렸다.
오해가 있었고, 이해가 부족했다. 네가 울먹이며 전하는 말을 다 듣고 나서야 나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내가 잔인한 얼굴을 거두자 너도 느지막이 울음을 그쳤다. 천천히 서로를 달랬고 각자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영화를 봤다. 영화 속 세상에는 누군가에 관한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사'가 있다. 조엘은 한때 사랑했던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 삭제를 의뢰하지만, 기억이 하나씩 지워져 갈수록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의 해변. 그러나 이 기억도 곧 사라질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묻는다.
"때가 됐어 조엘. 이제 곧 사라질 거야."
"우리 어쩌지?"
조엘은 대답한다.
"이 순간을 즐겨."
두 주인공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루하다느니 질렸다느니 불평하지 않았고, 이별과 새 출발을 결행하지 않았다. 라쿠나사를 찾아가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지도 않았다.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이 순간을 즐겨.” 영화 속 이 대사를 누군가는 “음미하자.” 이렇게 번역했다고 한다. 음식을 그냥 먹는 것과 음미하는 것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그냥 보내는 것과 충분히 음미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싸우고 화해하는 일도 사랑의 순리다. 그 과정을 거쳐 서로를 한층 더 이해하게 되고 나면, 나빴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지금 우리의 관계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