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지는 추억과 불안감
봄이다. 우리 동네에도 꽃이 활짝 피었다. 이맘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억이 펼쳐진다. 오랜 추억을 함께한 전자레인지의 문이 달칵, 하고 열린다. 부모님의 신혼집에서부터 주방 한편에 눌러앉아 있던 녀석이었다.
그 시커먼 기계에다 봉지 팝콘을 맡기곤 했다. 천천히 문을 닫고 둥근 레버를 돌린 다음, 시작 버튼을 눌렀다. 삑. 쳐다보고 있으면 눈 나빠진다고 꾸중을 듣고도 나는 늘 전자레인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노르스름한 불빛이 종이봉지를 감싸고 투명한 원판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지않아 봉지가 울룩불룩 부풀어 올랐다. 들끓는 환희를 감춰가며 숨죽여 지켜보던 장면. 삐-삐-삐-. 기계음이 울리면 종이봉지를 꺼냈다. 주둥이를 찢으면 고소한 냄새가, 새하얀 웃음이 흩날렸다. 짭조름한 기쁨을 입속으로 우수수 털어 넣었다. 고장 한번 내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팝콘의 개화를 보여주었던 전자레인지에 새삼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봄꽃은 환한 것이 팝콘과 닮았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휘청할 정도로 눈이 부시다. 이렇게 예쁜 꽃이 잠깐 피었다 진다는 게 섭섭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꽃은 꽃이고 팝콘은 팝콘이니까. 아무 때나 전자레인지를 삼사 분 돌려, 바로 피워낼 수는 없는 거니까.
피고 싶다고 서둘러 피고, 지기 싫다고 늦게 질 수는 없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식간에 대단한 결실을 볼 수는 없다. 지금이 좋아 그대로 버틴다고 해서 계속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맘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나 혼자만 꽃을 못 피우면 어쩌지, 걱정스럽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안이다. 그러니 탐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해도 실망은 말자. 사계절 부단히 애썼다는 사실을 나 혼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된다. 딱딱하고 볼품없는 옥수수 알갱이로 봉지 밑바닥을 굴러다녀도 누군가는 나를 골라줄 테니까.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를 잘 보살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