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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렐라 Jul 29. 2020

믿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니까

과테말라, 아티틀란 (Atitlán)호수

"포털(Portal)이 있어."

"포털??" 

"응,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 같은 것 말이야. 그 포털을 넘으면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기에??"

"아띠틀란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호수야. 저기 작은 산 보이지? 호수를 바라보는 저 산에 포털이 존재해. 실제로 다녀온 사람도 있어."

"정말로? 농담하는 것 아니고?"



과테말라에 있는 호수 중 여행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호수, 아티틀란(Atitlán). 화산이 붕괴해 호수가 자리 잡은 칼데라 호수로, 백두산 천지와도 같은 곳이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혁명의 꿈을 접고 이 호수에 안착하고 싶다' 고 했을 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호수 근처에 자리 잡고 사는 여유로운 과테말라 사람들의 삶을 바로 코 앞에서 느낄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멕시코에서 쿠바를 거쳐 과테말라까지, 쉴 틈 없이 여행하며 달려온 우리도 역시 아티틀란 호수를 쉼표로 삼았다.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


호수 근처의 많은 마을 중 한적하고 저렴하다는 산 페드로(San Pedro)의 한 호스텔에 무려 열흘 치 숙박비를 한 번에 내는 것으로 시작한 여행 중의 짧은 휴가. 여유로운 삶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서 빈둥대기만 할 자신은 없었다. 만 삼천 여명 남짓 사는 이 작은 마을 산 페드로에서 열흘을 어떻게 꽉 채울까, 고민하다 결국 내가 내린 선택한 것은 '스페인어 수업'이었다. 


과테말라 선생님영어로 하는 스페인어 수업. 열흘 중 오고 가는 날을 빼면 제대로 된 수업은 겨우 일주일 정도인데, 그 야트막한 시간 내에 내가 원어민 레벨의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문법을 공부하기는 싫고, 엉망이더라도 되도록이면 회화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자면 선생님과 내가 둘 다 흥미를 느낄만한 주제를 찾아야 했다. 처음 시작은 비교적 고상한 '중미와 한국의 문화 차이' 였으나 수업이 진행될수록 각종 미스터리, 가십거리, 다른 나라의 뒷담화가 주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입에서 '포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스페인어 수업을 하던 학원. 자연친화적이다. 


"한 달 전인가, 우리 동네 꼬마애가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갔거든. 분명 아침에 올라갔는데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밤새 찾아다녔어. 그다음 날 아침에도, 오후에도, 또 밤에도. 그렇게 꼬박 사흘을 찾아 헤맸는데 털끝 하나도 보이 지를 않더라고. 큰 산도 아니고, 동네 뒷산인데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럴리는 없지만 어딘가 발을 헛디뎌 빠졌거나, 뭐.. 누군가에게 잡혀갔거나, 아니면 부모님이랑 싸워서 가출을 했거나. 어쨌든 그 산에는 없다고 단정 짓고 더 이상 대대적으로 찾는 건 포기했어. 나흘째 오후였나, 동네 사람들 모두 슬퍼하고 있는데 그 꼬마애가 나무를 등에 이만큼 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로 들어오면서 인사를 하더라고. 꼭 그날 아침에 나무하러 갔던 사람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헐, 뭐지? 어디 갔다 온 건가?" 

"아니, 그 애는 나흘이나 지난 줄을 모르더라고. 그냥 본인은 하루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거였대. 아침에 나가서, 나무를 베고, 오후에 돌아오는 보통의 일과처럼. 나흘이나 지나서 돌아온 거라고, 다들 찾아다녔다고 말해주니까 엄청 놀라더라고." 

"엥, 그게 가능해?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ㅋㅋㅋ" 

"처음이 아니야. 포털은 정말로 존재한다니까."

"에이, 어디서 본인도 모르게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돌아온 거겠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런 걸 믿는다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 알지만, 그러면 안돼. 우리는 이걸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또 믿고 있으니까. 본인이 믿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야."



산페드로의 거리, 그리고 장이 섰던 날.


선생님의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거두었다. 비웃으려던 것도 아니고, 못 믿는 것도 아니라 놀라워서 되물은 것뿐이라고 바로 사과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선생님도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여행하며 편견 같은 건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도 모르게 원래 나 자신은 자꾸 튀어나오는 법. 선생님의 저 마지막 한마디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미안해. 계속 얘기해줘." 


이 날의 수업은 결국 영어로, 귀신얘기와 각종 미신들을 깔깔 거리며 공유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겨우 일주일의 스페인어 수업. 당연히 스페인어는 내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몇 년이나 지난 지금 그 선생님의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 날 선생님이 지었던 표정, 단호한 목소리는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선입견에 회초리를 찰싹 맞고 나니, 이후로 나와 다른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계속해서 이 순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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