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330일간의 세계일주
#5 조금씩 일상이 보인다. 그리고 시드니!
(140506~140514)
# 적응이라는 게 딱히 필요 없을 정도로 편하게 느껴진다 했었는데,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서울구경 온 촌놈마냥 모든 게 새롭게만 보이던 것들이 익숙해지고, 흥분해서 보이지 않던 좀 더 작고 일상적인 것들이 보이는 지금에서야, 적응이란 게 이런 거구나 라고 깨닫는 요즘이다.
보통 여행에서는 낯선 설렘의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화려하게만 보이던 도시의 겉모습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숨겨진 본모습을 볼 수 있었다. 최소 하루에서 이틀, 그것도 그동안 그 설레는 감정을 다 내뿜을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불같은 감정이 사그라들고나면, 그제서야 편안함과 함께 그 안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고, 웃고 슬퍼하고 싸우고 즐거워하는 감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듯 새로운 도시를 이제야 좀 알겠다 하면 떠나야 했기에 항상 아쉬웠는데, 한 곳에서 한달정도 살아보니 이곳의 일상을 좀 더 느긋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바깥만 내다봐도 마냥 좋았던 이국적인 거리에서, 이제 아침 7시면 시베리안 허스키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젊은 여자가 보이고, 각종 술이란 술은 다 파는 무지막지 큰 가게에서, 머리 살짝 벗겨진 인상 좋은 주인아저씨의 맞아주는 웃음이 보이고, 크고 낭만적으로만 보였던 우리 집에서, 뜰 계단을 두개 내려가면 보이는 작은 이름 모를 풀꽃이 보인다. 설렘때문에 외면당했던 소소한 행복거리들이 보인다. 여행하는 것과 살아보는 건 다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슬슬 하나둘씩 보이는 것 같다. 몸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좋다.
# 그저께 새로왔던 워홀러 둘이 못해먹겠다면서 때려치웠다. 안 그래도 어제 집에 갈 때 시불시불거리던 게 범상치 않았는데.. 한명은 나보다도 두 살이나 많은 형이었는데, 호주 넘어온지 3년 됐다고 했었다. 앞으로도 3,4년은 더 있을 거라 해서 왜 왔는지 그동안 뭐했는지 돌아가선 뭐할 건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물어봤다. 다른 사람들은 왜 워홀을 오는지 궁금하다. 대부분이 돈 벌거나, 어학연수 때문이겠지만 물어물어 들으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와 있더라. 그동안 참 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편하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했다.
처음 일하면서 놀랬던 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생각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꽤 된다는 거였다. 기러기 아빠처럼 가족은 한국에 두고 여기서 돈 벌어서 한국으로 보내는 분들, 애들이 다 커서 아예 호주로 넘어와서 일하시는 부부들, 다 부모님 나이 정도 되신 분들이었다. 한국에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야근하면서 돈 버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몸은 좀 힘들지 몰라도 벌이도 주변 환경도 한국보단 나으니까. 일 년 빡세게 일만 하면 팔만 불에서 십만 불까지도 벌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돌아와서, 2년은 뒤쳐진 것 같은, 한국의 삶을 들어보니 대기업에 들어가도 연봉 1억 찍는 건 불가능하다더라. 취직도 힘든데 호주나 다시 갈까 싶다 ㅋㅋㅋ)
# 호주 애들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얘네는 그냥 거리를 맨발로 막 돌아다닌다. 정확히 얘기하면 차를 가지고 어딜 갔을때, 땅을 디딜 일이 있으면 맨발로 다닌다. 편의점에 가보면 하도 돌아다녀서 발이 시꺼메질 정도인데도 걍 돌아다닌다. 편의점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다 신발 벗고 돌아다니길래 처음에는 신발 벗고 들어와야 하는 곳인가 싶어서 흠칫 놀랐다. 촌놈이 따로 없었다.
(여행을 다녀보니 비단 호주 사람들만의 습관이나 문화는 아니고 소위 말하는 서양문화권의 사람들은 다 저러는 것 같더라. 호스텔 공용공간에서도 매번은 아니지만 발이 숯검댕이가 되건 말건 돌아다니다가 심지어는 씻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자는 사람들을 한두 명 본 게 아니다.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들이 여럿 있는데, 저건 여전히 적응 안되고, 사실 이해도 잘 안 간다 ㅋㅋ)
또 다른 하나는, 비가 하도 자주 오다 보니까 비가 와도 다들 걍 맞고 다니는데, 우산 쓰고 다니는 거 'cool' 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얘네는 산성비가 아니라서 그런가. 한국에 있을 땐, 흐리면 우산 챙기고 빗방울 하나만 맞았다 하면 꺼내 쓰기 바빴는데, 요기 와보니 내가 무슨 Moisture+Phobia라도 걸린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날 비가 오는지 안 오는 지는 한국사람에게 물어보라는 미국 농담이 있었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한국인들은 유독 비오는 것에 대해 강박증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 정신없던 적응기간이 지나가고 여유가 생기니까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다들 잘 지내는지, 내가 없는 일상의 한 달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중딩 때부터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짧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던 놈들과 떨어지니까 카톡으로 연락은 자주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졸업하기 전에 여행이나 한번 다 같이 가고 싶은데, 내가 여행비용 다 댈 테니까 다섯 명 다 시간 맞춰보자고 했더니, 휴가 못 낸다고 못 간다 그런다. 돈을 대준다고 해도 이러니 염병할 썩을 놈들이 따로 없다. 2011년에 유럽 가는 것도 계획하다 결국 나 혼자 갔다 오고 작년 말에 부산여행 간 게 정말 처음이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M에게는 엽서 써서 보내주기로 해놓고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시티를 갈 일도 없었고, 집에 오면 씻고 밥 먹고 자고 일어나서 바로 일 나가고 하는 게 반복되다 보니까 여유시간에 뭔가 큰일(이라 쓰지만 장 보고 와서 음식 하는 것 이상의 다른 일상생활을 뜻한다 ㅋㅋ)을 하는 게 쉽지가 않다 ㅎ 다음 주엔 오프 하루 잡아서 K에게 졸라서 사진 찍을만한 곳으로 출사나 가자고 해야겠다. 캥거루랑 코알라도 찍어다 줘야 할 사람도 있다.
시험 준비하는 도서관 지박령들은 어떻게 지내나 모르겠다. 오지랖은 넓어서, 내 시험도 아니지만 폐인처럼 사람 꼴도 제대로 못하고 공부하는 사람들 보면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나도 미친척하고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저러고 있었을 텐데.. 다들 잘 됐으면 좋겠다. 내년에 한국 갔을 때까지 공부하고 있지 말고 ㅎ
# '중요한 건 다음 10년보다도 이번 주!'라고 얘기하는 무한도전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불현듯, 계획은 미래를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움으로써 현재를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 이러한 것을 하고 싶으니까 이 기간까지는 이거를, 그다음 기간에는 저거를 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나를 정하는 거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 난 계획을 철저하게, 그리고 정말 완벽하게 잘 세우는 사람이지만 하지만 결국 그 완벽한 계획을 실현시키는 건 거의 못하는 사람이다. 계획 세우고 나면 마치 그 일을 거의 다 끝마친 것 마냥 긴장이 풀려버리고, 계획이 확실하다는 안도감에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10년 후의 장밋빛 미래를 그리면서 계획 세우느라 힘 빼지 말고 당장 오늘부터 열심히..
# 넥센이 지고 나면 꼭 자기 전에 기분이 안 좋다. 근데, 올해는 꽤나 잘한다. 버킷리스트에 넥센 코시 홈경기 관람이 있는데 그 기회가 올해일까 봐 개인적으로 너무 걱정된다. 설레발이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안돼.. (140506)
# 하루 미뤄서 다녀온 시드니. 왜 대도시가 매력적인지 보다 보니 알겠더라. 이렇게 한 포인트에서 4시간여 동안 500장 넘게 찍은 적이 프라하 말고 또 없었던 것 같은데 ㅎ 다른 말 필요 없이 좋았다. 돌아오는 기차 놓칠 뻔했던 것 빼고. 좋은 포인트 알려준 J에게 감사를 :) 나머지 사진과 끄적끄적은 내일 (140513)
시골 촌놈이 도시 구경 가는 것처럼, 시드니를 갔다 왔다. 계속 우와우와거리고 걷지를 못하고 계속 뛰어다녔다.ㅋㅋ 자유시간이 4시간뿐이라 한 곳이라도 제대로 보자고 생각하고 하버브릿지랑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서만 4시간을 넘게 있으면서 이쪽에서도 찍어보고 저쪽에서도 찍어보고 해가 떠있을 때도 찍어보고 지고 나서도 찍어보고.. 야경 욕심 부리다가 기차 놓치고 1시간을 꼼짝없이 묶일뻔했지만, 기차가 연착된 덕분에 예상 시간에 맞춰서 딱 집에 올 수 있었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너무 많다. 뉴캐슬에 있는 동안은 다른 도시 욕심 부리지 말고 시드니 한 곳만 지겹도록 갔다 와야겠다.
(시간 지나고 이 글을 보니까, 브리즈번을 못 가본 게 아쉽다. 골드코스트 야경이 그렇게 좋다는데 말이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가까운 역에서 내려서 바로 역 앞으로 나가면 길거리 공연을 하는 어보리진들이 있다. 몸에다가 흰색 물감 같은걸 뼈처럼 발라놓고 부메랑처럼 생긴 타악기를 두개 들고 딱딱 소리를 내면서 춤을 춘다. 그 옆에는 기다란 관악기인데 괴랄한(우웨이요옹옹옹옹 뭐 이런 식으로..// 지나고 보니 이게 디제리두였다. 작년 이랑 올해가 유행이었는지 여행 다니는 동안 이걸로 길거리 공연하는 사람들을 남미/유럽에서 꽤 많이 봤다.)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 신기해서 사진이랑 동영상 찍어놓은 게 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올리는 게 민폐 같다.
시드니도 명동거리처럼 한국사람들이 정말 많더라. 아니 너무 많더라. 유학생들부터 워홀러들까지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기차역 스시집에서 알바하는 사람도 한국인이더라.ㅋㅋㅋㅋ 이젠 세계 어딜 가든 한국어만 할 줄 알면 굶어 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분 간격으로 한국어가 들리니 여기가 서울인지, 시드닌지..
오페라 하우스 바로 앞 계단이 그늘이 졌길래 노을 질 때까지 기다릴 겸해서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는데, 바로 앞에 젊은 여자 둘이 앉았다. 그렇게 1시간 여를 앉아있다 갔다.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둘이 앉아서 사진 찍고 얘기하고 웃고 하는 모습이 좋아서 파파라치마냥 그네들을 피사체로 수십 장을 찍었다. 예전에 베네치아에서 여자 둘이 부둣가에 앉아있는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바알갛게 물드는 하늘과 어우러지게 왼쪽 아래에도 놔보고 오른쪽 아래에도 놔보고 했지만, 그래도 딱 정가 운 데에 두고 찍은 게 가장 예쁘다. 생각해보니까 자리 뜰 때까지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게 함정.
J 덕분에 알게 된 맥쿼리 포인트는 어제 올린 사진처럼 야경이 진짜 좋았다.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동시에 찍을 수 있다니.. 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조깅하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해가 지니까 추워서 나는 바람막이까지 꺼내 입었건만, 나시에 거의 팬티처럼 얇은 핫팬츠를 입고 뛰는 사람들을 보니까 경악스러웠다. 오늘 새벽에 청소 끝내고 다음 가게로 이동하는데 형님이랑 둘이 춥다고 덜덜 떨면서 히터를 틀어놓고 몸을 녹이고 있는데 동호회처럼 20여 명이 새벽 6시에 조깅하고 있더라. 또 경악스러웠다. (14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