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330일간의 세계일주
#4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산다는 것.
(140422~0503)
# 참 많이도 싸돌아다녔다. 2011.06.10 2012.07.31 2013.01.14 2014.04.04 2014.04.11. 2011년 2월 7일에 10년짜리 여권 만들면서, 만드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매년 나가야겠다고, 반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다녔었는데.. 이래서 말 함부로 내뱉는 거 아닌가 부다. 스페인 체코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영국 인도 일본 호주 도장 찍힌 곳들만 나열해도 오래 걸리네. 이제 절반 정도 채웠다. 남은 6년도 힘내야지 ㅋㅋ 내일 호주 은행계좌 여는 것 때문에 여권 꺼냈다가 벌써 한 시간째다. 스탬프가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스탬프 예쁘고 정갈하게 찍는 건 한국이 최고인 것 같다. 신기하게도 저 도장받는 순간들 만큼은 큰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다 기억난다. 루마니아에서 불가리아로 넘어갈 때 예쁜 쌍둥이 자매를 비롯한 캐나다 7인 가족이랑 예카테린부르크 출신 러시아 대학생이랑 같은 기차칸에 타고 있다가, 한국 사진 준다고 오십여 장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줄리아라는 이름을 한글로 써주다가 받았던 불가리아 스탬프. 불가리아에서 터키로 넘어갈 때 야간 버스에서 입안이 다 헐 정도로 피곤한와 중에 짐 검사한다고 새벽 세시에 다들 내리라 그래서 비몽사몽 간에 여권 대신 비행기표 줬다가 입국 못할 뻔했던 터키 스탬프. 호주 처음 들어올 때, 신발에 묻은 흙이랑 사과 씨까지 검사한다고 해서 벌벌 떨다가 받았던 호주 스탬프 등등.. 버스와 기차에서도 스탬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새삼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섬 아닌 섬나라 대한민국 ㅎㅎ 내년엔 남미 스탬프가 덕지덕지 붙었으면 좋겠다.(140422)
* 이 글을 쓸 때 설레면서 뒤적였던 여권은 내 손에 더 이상 없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남미 스탬프를 덕지덕지 채우고는 유럽에 넘어와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열흘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과 가장 아끼던가 방도 아까웠지만, 무엇보다 아까웠던 건 저 도장들이었다. 막상 잃어버리고 나서는 '이렇게 또다시 한바퀴 돌아야 할 이유가 생겼네.'라고 쿨한 척 했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도 생각할수록 아깝고 또 아깝다. 한 천불 정도 더 줄 수 있으니까, 당장이라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ㅠㅠ
# 호주에 온지 2주가 넘었다. 적응기간이랄 것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동화된 기분이다. 매일매일 일하니까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 오늘은 무슨 요일인지도 잘 모른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 지겨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적응되니까 나름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하루 전체를 어제와 다르게 살기는 쉽지 않을 거고, 단 한두 시간만이라도 어제와는 다른 한 가지씩 하면서 하루하루 의미 부여하는 것도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방법인 것 같다. 그제는 좀 큰 요리하고 어제는 산책을 했었고 오늘은 책보며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일은 사진 찍으러 나가고 모레는 잔디밭에 누워서 별이나 봐야겠다. 여긴 별이 진짜 많다. 레알 개 많다. 정말 맑은 날은 은하수 비슷하게도 보인다. 호주는 정말 복 받은 나라다. 구름 낀 날이 아니면 별 헤는 밤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 곳이다.(너무 많아서..) 호주 떠나기 전에 꼭 지구의 배꼽이라는 울루루 가서 밤새 별 보면서 사진 찍어야지.
호주에 있는 동안 뭘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세계일주 여행 계획이나 세우면서 저축하는 목표나 구체적으로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다.. 페북에다가 끄적일지 블로그에다 끄적일진 모르겠지만, 무작정 생각만 하고 있는 것보다는 어쨌든 끄적이면서 언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처음 유럽 가기 전에 샀던 '세계일주 바이블'을 보면서 서른 전에 꼭 지구 한바퀴 돌아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내년에 갈지 안 갈지 모르지만 안 갈 가능성이 높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계획이라도 세워놔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행동하지 않는 꿈은 의미가 없다라고 다들 말하지 않던가? 실패 두려워말고 실제로 해봐야지. (140427)
세계일주 계획 짜려고 지도를 펼쳐보니까 꼭 가봐야겠다고 꼽은 곳만 해도 답이 없을 정도로 많다. 우유니 사막, 이스터 섬, 페루 쿠스코, 쿠바 아바나, 사하라 사막, 페즈, 케이프타운.. 늦어도 11월 12월에는 떠나야 가고 싶은 곳만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역마살 낀 병자는 주변에 흔하지 않은가 보다. 서른 살 전에 한바퀴 도는 거 다음 목표는 신혼여행으로 세계일주 하기였는데 ㅋㅋ 생각할수록 답이 없다. ~_~ (140503)
# 고작 청소라고는 하지만 여기도 나름 팀이 있고, 같이 일하는 팀장 형님이 열심히 이것저것 배우려고 해서 그런지 몰라도 많이 챙겨주시고 예뻐해 주신다. 엄청 깐깐한 사람이라고 소문나서 나보고 뭐 됐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내가 엄청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은 아니지만 나름 형님이랑은 잘 맞나 보다. 형님이라고 하지만 우리 어머니보다 두 살 어리시다는.. ㅋㅋ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하는 만큼, 직접적인 돈은 아닐지라도, 어떻게든 보상은 받기 마련이고, 말로 자기 PR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PR 하는 것이 더 강력하고 진실되게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 같다. 남들에게 인정받거나 관심받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생각했을 때 필요하고 내가 즐거우니까 하는 일들은 당장엔 아무도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나도 괜히 서운해지거나 외롭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 알아줄 사람들은 알아봐주고 챙겨주기 마련인 갑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여러 번 느꼈던 건데, 실제로 여기서도 일하다 보니까 더욱 많이 느낀다. 잘해줄 때 더 긴장 타고 잘해라. 의방 생활하면서 정말 수도 없이 되새겼던 말인데,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데 도움 많이 된다. 왜 그렇게 융통성 없이 일하냐는 소리를 종종 들었었는데, 이게 고지식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간다 :)
아참, 2주 정도 일했는데 내 월급은 1000불을 찍었다. 한국에 있는 K랑 카톡 하다가 월급 얘기했더니, 한국 돌아오지 말라고 하더라 ㅋㅋ 걱정 마 내년에도 안 갈지도 몰라.
단순노동을 하다 보면 잡생각 없이 일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 침대 시트를 가는데 7분 정도 걸리는데 그 사이에 뭔 파노라마처럼 그렇게 많은 생각이 머리에 잠깐 잠겼다가 빠져나가는지.. 순간순간 드는, 그렇지만 그냥 보내기는 아까운 생각들을 어떻게 붙잡아 놔야 할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아까는 음성 녹음한답시고 침대 시트 걷으면서 중얼중얼 거렸다가 형님이 진지하게 걱정하는 눈빛을 쏴주셨다. 젠장 (140427)
5월 1일부터 새벽일을 시작하게 됐다. 미리 먹고 미리자서 졸리진 않지만 걱정된다. 한시에 나가서 다음날 오후 세 시반쯤 들어온다. 두 시간 정도 씻고 먹고 정리하고 여섯 시 즈음 자서 열두 시 즈음 일어난다. 오늘이 삼일 짼데 크게 피곤하진 않다. 일하는 시간 제외하면 레알 자고 먹고 싸는 것 밖에 안 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어제 새로운 팀원들이 왔다. 한 명은 동갑이고 한 명은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이신데 호주에 있은지 3년째라고 했다. 3년 동안 뭐했는지 궁금한데 어제도 오늘도 딱히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동갑내기랑 그래도 얘기 많이 했는데 저 둘도 새벽부터 일하는 팀이라 인사치레 겸 '식사하셨어요?'라고 물었는데, '네! 먹었어요.... 제가 많이 느린가요?'라고 대답해서 아니라고 했는데 내가 갈구는 줄 알았나 보다 싶어서 얼른 '그런 뜻 아니에요 ㅋㅋㅋ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ㅋㅋ'라고 해줬다. 반농이어서 갸도 그냥 웃긴 했는데, 뒤돌아 생각하니 저 말이 저렇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에 섬뜩했다. (140503)
# 앞에서도 끄적여놨지만, 순간순간 자투리 시간 잘 이용하고 의미 부여해야 할 듯. 이동시간 포함해 일이 모두 끝나고 돌아오면 아무리 길어봐야 3시간 정도밖에 자유시간이 없다. 새벽일 하면서부터 정말 하루하루에 의미 부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느끼고 있다. 아무런 의미없이 몸만 움직이다가 예능 프로 보면서 꺅꺅 거리면서 잠드는 게 전부가 되지 않도록 정신 바싹 차리고 살아야지. (140427)
S형님이랑 얘기하면서 매번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남의 입에서 들었다. 200을 벌어도 그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나라.. 일 안 하면 주당 삼백불이 지급되고, 집은 평생 렌트해서 살아도 은퇴하고 나면 정부에서 무료 주택이 제공된단다. 돈 모으려 아등바등 일하면서 자기 삶, 행복 포기해가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곳. 천연자원도 없고 먹여 살려야 할 인구는 많은데 기술과 서비스로 밖에는 돈 벌 수 없는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호주가 부럽거나 영주권 따서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한국이 참 불쌍한 나라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여러모로 대단한 나라다 한국은. 그래서 그런지 여기서 만난 한국인 노동자들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사람들이더라. 살면서 그렇게 여유 있는 집에서 자랐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의 인생 얘기나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에 부모 울타리 안에서만 놀던 도련님인지 문득 깨닫게 될 때가 많다. 처음에는 영주권을 딴다고 '아무 여자나 만나서 애를 가져야 된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솔직히 역겨웠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인생 얘기를 듣다 보면 왜 저렇게 돈에 집착하고 한국을 싫어하는지 이해가 가는 스토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더라. 그들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행동들로 그들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더라. 그것이 도덕적이라거나 정당하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왜 저렇게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양아치 같이' 사는 지 함부로 비난할 수 없겠더라. 그 사람들의 그런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인정하는 것과 내가 그렇게 사는 건 다른 문제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부진아 혹은 문제아라고 규정짓고 사회악인 것처럼 규정짓는 학교 현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자주 되새기게 되는 말이 있다. '인간은 항상 삶에 있어서 두 가지를 고민하고,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곤 하는데, 바로 외로워지거나 천박 해지거나의 문제이다. 그래서 모든 젊은이들은 천박 해지지 않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다.(140503)
#아, 그리고 집에 쥐가 있다. 검지 중지 합친 정도 크기/길이의 녀석인데, 그렇게 빠를 수가 없다. 어제 결국 T의 방에 몰아놓고 D와 같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생포해서 같이 셀카를 찍자는 작당모의를 했으나 귀신같이 사라지더니 오늘 일하고 집에 오니까 부엌을 쓱 지나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조만간 잡히는 대로 같이 셀카 찍어서 올릴 예정이다. 크지 않아서 그런지 크게 문제없는 놈이라면 같이 계속 살아도 좋을 거 같다. 같이 살자꾸나. 다음에 볼 땐 이름도 지어주구먼. 미국에서 쥐랑 같이 살다가 트라우마 생긴 E한테 말했더니 밥 먹는데 자꾸 쥐덫, 쥐약얘기를 노골적으로 해서 밥맛 똑 떨어지게 하더라 ㅡㅡ (140427)
지난번에 같이 산다는 쥐 얘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어느 집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 부엌에도 가스레인지가 있다. 한 일주일 전인가? 일 끝나고 집 오자마자 배가 고파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갔는데, 후다닥 뒤켠으로 숨는 그놈이 보였다. 아래쪽 양 옆쪽은 다 막혀있을 것 같아서, 비닐로 꾸역꾸역 그 부분을 다 막아놨었다. 그러고 샤워하고 나와서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방 앞에 두었던 슬리퍼가 갑자기 움직였다. 그놈 새키가 내 슬리퍼 안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있더라. 저걸 어떻게 잡지 생각하는 와중에 슬쩍 나랑 눈마주치 더니 휙 도망가더라. 비닐이라도 찢고 나왔나 싶어서 가봤는데 꾸역꾸역 막아놓은 그대로 있고.. 어디로 나온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그때부터 잡겠다는 생각보다는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ㅋㅋ 집에 남은 치즈를 12조각으로 잘라서 아침저녁으로 한 조각씩 주고 있다. 한네 시간 지나면 여지 없이 사라져있다. 꼬박꼬박 잘 먹는 것 같아 뿌듯하다. 그 표시로 가스레인지 위에 쥐똥 만한 그것으로 감사인사도 꼬박꼬박 하고 계신다. 망할새키. (140503)
# 페북 잘 보고 있다는 얘기를 다섯 번째 들었다. 잘 봐주시니 감사할 뿐. 잘 보고 있다는 얘기 들으니까 괜히 ~한 척하면서 뻥치고 있는 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최대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꾸미지 말고 쓰는 게 중요하니까, 감정은 날 것 그대로, 표현은 최대한 쉽고 솔직하게 쓰려고 더 노력해봐야겠다.(1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