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인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곳
2013.01.31 Varanasi Airport 12:20 델리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에
바라나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이쪽에선 어린아이들이 까르륵 거리며 연을 날리고 크리켓(영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로 야구와 비슷하다.)을 하느라 정신없지만, 저쪽에선 '람 람 삿다헤'(신은 알고 계신다)를 외치며 불길 속에 사람을 '웃으며' 떠나보낸다. 처음엔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이상한 도시의 양면이다. 우리는 자이살메르를 떠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우리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바라나시로 향했다.
바라나시; 빛의 도시
힌두교의 성지 7개 중에 하나인 바라나시. 베나레스, 카시 등 여러 지명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흔히 알려진 ‘바라나시’는 빛의 도시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주(?) 정도의 지명이랄까? 여러 힌두교 성지가 있지만, 힌두교도들의 가장 큰 소원이 죽을 때 바라나시에서 화장되는 것이라고 할 만큼 바라나시는 힌두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다리가 아파 들렸던 악기상의 주인이 말하기를, 바라나시를 성지로 여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갠지스 강의 지류 중에서 유일하게 이 바라나시의 지류가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다음날 정확히 강 건너편에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건물들에 가려 일몰은 볼 수 없었지만, 빛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일출은 정말 장관 중에 장관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강가에 있는 도시기에 안개가 자주 끼기 때문에 이렇게 맑은 하늘의 아침을, 더군다나 구름 한 점 없는 일출을 볼 수 있는 건 일 년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더라. 정말 이 아침의 대단한 일출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빨래하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배를 타고 나간 여행객들이 새빨간 빛을 받으며 한 데 어우러진 장면은 오묘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빨간빛을 보자마자 발코니로 뛰어나가 부스스한 머리에 세수도 안 한 얼굴, 퉁퉁 부은 눈으로 입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을 서로 보고는 아침부터 한번 크게 웃었다. 처음에는 새빨간 빛을 비추던 해가 떠오르면서 조금씩 노랗게 변하더니 나중엔 황금빛으로 강물에 부서지기 시작했고, 황금빛 강물 위로 지나가는 사공과 여행객들,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는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내게 보여주었다. 마치 비단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며, 햇빛을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반사하는 강물은 우리를 그 황금빛이 다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 지켜보도록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러, 결혼을 하러, 화장을 하러 오는 도시라 외부인이 많지만, 이곳 역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는 곳이다. 아침에 가트(강가에 목욕을 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계단 같은 시설)에 나가보면 빨래하는 사람과 연 날리는 아이들, 크리켓 시합을 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메인 가트에서는 옷을 훌렁훌렁 벗고 물에 들어가 목욕하는 사람들부터 머리에 물감 같은걸 찍어 발라주며 힌두교의 종교의식(?)을 행해주는 사람들, 이발하는 사람, 길거리에서 먹거리를 파는 사람,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일상을 만날 수 있다. 복잡하고 정신없고 사람만 많아 보였는데 하루쯤 지나니 서서히 이곳의 일상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목욕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속옷만 입은 채 물에 들어가 연속으로 세 번 온몸을 머리까지 강 속에 담근다. 그리곤 똑바로 서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곤 가트에 앉아 비누로 몸을 닦고 강물로 씻은 후 가져온 속옷과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한강보다 5배가 더 더럽다는 저 강물에 들어가 머리까지 담그는 모습도 신기한데 그렇게들 씻고 나오면 어쨌든 그 모습이 말끔해진다는 것도 참 신기했다. 그 모습을 같이 지켜보던, 인도에 세 번째 왔다는 형님께서 같이 목욕하러 들어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다. 웬만하면 현지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보는 편인데, 도저히 그 신성하다는 갠지스 강에는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길거리를 제 집 마냥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는 소와 개들의 배설물이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이 공동화장실로 이용하는 가트 담벼락의 소변들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를 본 나로서는,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인도에도 한국의 풍물이?
가트에 앉아 사람 구경 배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났다. 풍물패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 반가운 소리이긴 했지만, 인도에서 꽹과리 소리가 날 리가 없지 않은가? 귀가 이상해 환청이 들리나 싶어 귀를 문지르고 있는데, 사람들을 가득 실은 배에서 분명히 꽹과리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확 들어 미친 듯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카메라 렌즈를 고정하고 셔터를 눌러댔다. 내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신기했다. 북이야 어느 나라에든 있는 거니까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한국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꽹과리를 본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배가 점점 멀어져가고 직접 눈앞에서 보지 못해서 아쉬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같이 앉아있던 꼬마가 나를 부르더니 뒤를 가리켰다. 돌아봐도 아무것도 없어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더니, 갑자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꽹과리 소리가 들렸고, 정말 말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알고 보니 결혼식 행사였고 한국의 풍물처럼 행사의 선문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악기를 하나씩 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꽹과리처럼 생겼으면서 소리도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뒤에서 치는 북도 한쪽 면을 치기는 하지만, 한 손엔 장구의 채편같이 가는 채를, 다른 손엔 궁 편 같이 두꺼운 채를 쥐고 치는 악기였다. 잠깐 쉬기에 ‘인도 전통악기냐?’ ‘이름이 뭐냐?’고 속사포 쏘듯 물어봤는데 뚱한 표정을 짓다가 웃기만 했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어로 다다다다 말을 걸었으니, 당황스러웠나 보다. 한 번만이라도 쳐보고 싶었는데, 결혼식이 끝난 것도 아니었고 이름모를 그 악기 역시 꽹과리 소리만큼이나 시끄러워서, 괜한 이목을 끌까 봐 그만두었다. 외국인이 인도 악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한지, 코브라 피리만 가지고 있어도 다가와선 같이 사진 찍자고 하고, 피리 불어달라고 하는 인도인들 앞에서 저걸 쳤다간, 난 오늘 몇 시간을 붙잡힐지 모르는 일이었다.:P
화장터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고 어떤 죽음이든 슬픈 것이지만, 힌두교도들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바라나시 화장터는 바라나시를 가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였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신선하고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이 화장터 때문에, 바라나시행 기차에는 대부분 죽을 때가 다 된 노인들과 짐칸에 운반되는 시신들이 다수라고 한다. 바라나시에서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한 시신들이나, 운반되어온 시신들은 염을 한 후 각 신분별로 다른 색의 천으로 싸인다. 그리고는 시신을 운반하는 운반꾼들이 앞장서고 유족들이 뒤따르면서 운반꾼이 ‘람 람 삿다헤’(라마신은 알고 계신다)라고 선창 하면 유족들은 뒤에서 똑같이 복창한다. 염을 도대체 어디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장터 근처 골목 어딘가에 앉아있다보면 하루에도 수십구의 시체를 볼 수 있었고, '람 람 삿다헤'는 바라나시 가트 근처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아침을 먹고 난 직후부터 저녁 먹기 직전까지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그 소리 때문에, 들릴때마다 나도모르게 숟가락 내려놓고는, 엄숙해져야 할 것만 같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처음엔 굉장히 어색했다.
화장터는 열 개정도 화장하는 자리가 계단식으로 있고, 그 자리에 땔감을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는다. 그렇게 화장터로 운반된 시신은 제 차례를 기다렸다가 장작 위에 놓여서 3~4시간여를 빠지직빠지직 소리를 내며 태워진다. 흰 천으로 둘러싸여 있던 시신은 점차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유족들과 인부들, 몇몇의 여행객들이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본다. 화장이 시작되면 끝나기까지 서너 시간, 안면조차도 없는 사람이지만 빠지직거리며 타들어가는 그것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고, 조심스러워졌다.
이곳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는, 아이를 밴 채 죽은 임산부와 수행자, 코브라에 물린 사람, 14살 미만의 어린이, 동물은 화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시신들은 그냥 강물에 그대로 떠내려 보내는데, 새벽녘에 보트를 타는 여행객들 중에 고요한 갠지스 강과 바라나시를 즐기다가 질겁을 하고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서너 시간을 한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으니 구부정한 노인이 다가와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줬다. 가이드북에 화장터에서 그렇게 설명해주곤 돈을 뜯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상대하지 말란 말을 봤었는데, 멍하니 듣고 있다가 남은 잔돈을 쥐어주곤 떠났다. 군인과 경찰, 브라만들은 화장하는 곳이 따로 있다, 코브라에 물린 사람은 시바신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 화장하지 않는다, 젊은 여자는 흰 천으로 염을 한다는 말까지는 끄덕이며 들었는데, 시신을 화장하기 전에 불을 붙이는 사람이 시신 주변을 5바퀴 도는데 그 이유가 물, 바람, 불, 땅 등의 다섯 신을 위해 도는 거라는 얘기에 확 정신이 들어서 웃으면서 잔돈을 쥐어주곤 화장터를 벗어났다.
바라나시에서 화장되는 걸 최고의 죽음으로 여기며 그 땔감 값을 모으기 위해 평생 돈을 모으는 힌두교도들. 최고의 죽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고 단 한 번의 영예로운 죽음이 일평생의 목표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바라나시에서 화장되면 절대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바라나시에서 화장되고 싶어 한다는 그네들의 죽음관 역시 마찬가지다. 숙소 주인과 인도 여행 경험이 있는 형님께서 화장터에서는 카메라를 꺼내지도 말라고 하셔서 사진기록은 없지만, 적나라한 장례의식을 머릿속에만 담느라 삶과 죽음을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인도의 어두움
화장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해서도 되돌아보게 되는 우울한 이틀을 겪으면서 나름 의미 있는 경험을 했지만, 그보다도 바라나시에서 가장 크게 임팩트를 남긴 기억은 다음 한마디로 시작됐다.
“380루피씩 나왔으니까 400루피씩 걷을까요?”
그때까지도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여행 초반부터 마음 한 편을 찝찝하게 했던 원인모를 불편함의 의미를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바라나시의 숙소 앞 카페에서 저녁을 먹는데, 가장 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던 한국인 여행객들이 식사를 마치고 카운터 앞에서 각자의 끼니 값을 정산하고 있었다. 식사 중에도 여행 이야기를 재밌게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던 팀이라 ‘어떤 분들이시길래 인도 여행을 저렇게 재밌게 했을까?’하는 호기심이 자연스레 들었다. 말을 붙여보진 못했지만 궁금해서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계산을 해주려고 기다리던 인도인 점원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씁쓸한 웃음. 그 오묘했던 표정은 한 시간 반여를 기다린 끝에 나온 식사 앞에서 잠깐 젓가락질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카페의 직원이라 한국어를 웬만큼 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어제저녁 시장에서도 만났던 사람이었다. 저녁을 시장에서 간단한 빵과 카레로 때우던 모습에 단골집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식사 값이 바로 한국인들이 전혀 부담 없이 이야기하던 20루피(약 한화 400원)였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보자면,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무언가를 구입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돈’이다. 여행지로서의 인도에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한데, 바로 ‘흥정’이다. 인도에 적응하기 가장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 이 ‘흥정’이었다. 인도인들 중에 몇몇은 외국인들에게 물건을 팔 때 가장 먼저 국적을 물어본다.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에게 처음 흥정가를 각각 다르게 부른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먼저 국적을 물어보는 사람들은 꼭 그런 것 같았다. 뻔히 한국인이 가격을 물어보고 다른 물건을 둘러보는데 미국인이 들어오자 배의 가격을 부르는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팔면서도 당당하게 미국인이라 가격을 다르게 불렀노라고 대단한 비밀을 공유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주인도 있었다. 보통 한국인에게 부르는 가격은 제시한 금액의 절반 정도가 Local price라고 보면 된다. 미국인은 Local price의 4배 정도로 높게 부른다. 흥정하는 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처음 세네 번은 비싸다 아니다로 실랑이를 하다가, 포기하고 가려는 모습을 보이면 주인이 "OK, Your best price?!"라며 붙잡는데 이때부터가 진짜 흥정의 시작이다. 물건이 마음에 든다고 best price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에 사버리면 바가지 덤태기를 쓸 수밖에 없다. 조금씩 조금씩 가격을 올리고 내리면서 몇 번의 가는 척과 붙잡는 척을 더 하고 나면 더 이상 깎을 수 없는 가격대가 나오고, 거래가 성사된다. 이 흥정의 재미를 알아야 인도를 여행하는데 마음이 편하다. 흥정은 음식점과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인도의 상점과 택시, 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한 교통수단으로 택시처럼 돈을 지불하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인도의 이동수단)를 이용하는데 필수인 기술이자 일상이기에..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했다. 솔직히 한화로 바꾸면 천 원 이천 원, 많아봐야 오천 원 정도의 값인데, 그걸 어떻게든 뜯어먹겠다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말장난을 하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처음 부른 가격에 그냥 사자니 눈뜨고 사기당하는 기분이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물건을 훨.씬. 싸게 구입했다는 이야기라도 들으면 하루 종일 찝찝했다. 그렇다고 수전노처럼 어떻게든 가격을 깎으려고 웃고 친한척하고 입에 발린 말들은 하기도 싫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여행자에게 필수품인 생수였는데, 인도에서는 상점에서 파는 생수 중 같은 Mineral Water라도 비닐 캡이 씌워진 걸 사야 한다. 씌워지지 않은 물을 샀다간 수돗물로 가득 채워진 무늬만 생수인 물을 마시고 배탈이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화로는 500원밖에 하지 않는, 여행자에겐 정말 중요한 물을 가지고 빈병을 가져다 굳이 본드로 뚜껑을 다시 붙여가며 속여서 ‘추잡’하게 장사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네들의 모습은 그날 바라나시의 카페에서 본 점원의 표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여행자에겐 많지 않은 천 원 이천 원일뿐이지만, 하루하루 제대로 끼니 때우기가 어려운 현지인에겐 한 끼를 풍족하게 먹을 밥값이고 지하철은 두 번, 버스는 세 번까지 탈 수 있는 돈이었다. 인도의 빈부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고 사회적 기본 인프라는 낙후되어 있으며 모든 인도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절대적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인다. 한국에서는 이제 '380원씩 나왔으니까 400원씩 걷을까요?'라는 말에 부담감을 가질 사람은 없다. 대부분이 '3800원씩 나왔으니까 4000원씩 걷을까요?'라는 말이나 '38000원씩 나왔으니까 40000원씩 걷을까요?'라는 말로, 200원 2000원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여행객들은 인도인들이 그렇게 목을 매는 20루피쯤은 부담으로 느끼지도 않지만 인도인들에게는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던 그 순간, 그 점원의 씁쓸한 미소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절대적 빈곤을 30~40년 만에 해결하고 급성장한 한국의 경제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 것인지, 과거 우리의 모습이었던 이곳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또한 그에 비교되는 인도의 어두움이 보였다. 인도인들이라고 똑같은 인간인 외국인들에게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그네들도 학교에서 배우는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은 나쁜 거다’라는 도덕적 인간다움을 버려가면서 그렇게 살고 싶을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속물 같은 삶을 선택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뭐가 맞는 건지도 모르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 물건을 정직하게 팔아 합당한 이득을 얻었을 때도 내일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전기가 끊기지 않고, 내 자식들을 먹일 수 있다면 누가 그렇게 '비 도덕적인' 일상을 살까?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 실제로 존재하는 빈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부도덕들. 이것이 현재 인도의 어두움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단지 인도인들 전체가 낮은 도덕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일반화시켜 인도인들의 특성이라고 규정짓고 잘못이라고 함부로 비판하기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현실과 삶의 무게를 배제할 수 없다.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로 돌리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렇다고 빨리 발전하지 못한 정부 탓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인도의 현실과는 달리 나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전엔 기성세대들이 이루어 놓은 경제성장에 감사하기는커녕 당연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는 그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기성세대의 피땀과 희생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편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단지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게 해 준 것에 심심한 감사 정도 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도 여행을 통해서 경제성장이 절대적 빈곤의 해소와 같은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한국의 그림자
한국의 경제성장을 외부에선 ‘한강의 기적’이라 칭하며 극찬하고, 많은 개발도상국들 중에는 한국의 그러한 급격한 성장을 모델로 삼는 국가들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역사적인 시대 속에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우리 당사자들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봐도 선례를 찾기 어려운 실례(實例)인지 잘 모른다. 그 경제성장 속에서 우리네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우리에게 물려준 건 무엇일까? 절대적 빈곤에 의한 배고픔의 해결? 구체적 수치로써 선진국과 어깨를 맞출 수 있는 GDP 2만 불 시대? 이번 여행에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건, 바로 ‘부르주아적 너그러움’ 이었다.
다만 이들 오뉘에게 한 가지 좋은 데가 있다면, 부르주아의 집안 아이들이 흔히 갖는 덕 - 너그러움이다.
- 『광장』, 최인훈
최인훈의『광장』에 나오는 그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부르주아의 덕?, 너그러움? 부르주아가 가지는 경제적인 풍족함, 여유를 뜻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넘어갔지만, 인도 여행을 하면서 내가 알게 된 의미는 ‘돈에 연연해서 치사하거나 추잡해지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여유’였다. 많은 국민들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한국은 이제 ‘내일 뭘 먹나’가 아니라 ‘내일은 뭘 하나’를 대부분 고민한다. 삶을 생존의 측면이 아니라 질적인 면을 따지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측면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내일 굶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일을 굶지 않게 해주는 부의 여유가, 돈에 연연하지 않음으로써 도덕적인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여유로 이어진 것이다. 인도의 어린아이들은 쪼꼬렛을 외치고 어른들은 달러를 외치는 모습은 과거 외국인들에 대한 한국전쟁 전후(戰後) 우리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는 외국인들을 만나 쪼꼬렛이나 달러로 대표되는 구걸을 하지 않는다. 경제성장은 단순히 배고픔을 벗어난 것 이상으로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인도의 현실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내 삶에 감사해야 할 이유와 대상을 새로 찾았다는 것에 대한, 한국의 과거를 통해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알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의 말이다.
이제 한국의 어두움은 크지 않다. 하지만 성장한 만큼 길어진 그림자가 존재한다. ‘부르주아적 너그러움’이 긍정적으로는 돈을 제대로 쓰는 모습으로 (기부를 하거나, 돈이 보인다고 훔치지 않거나 하는) 나타나기도 하지만, 많은 상황에서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당연하다는 듯 돈에 연연하지 않는 과소비로 표현된다. 맛있는 게 없어서나 다이어트가 아니라 정말 먹을 게 없어서 굶어야 하는 서러움과 그런 의식주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해서 형제자매, 부모 자식을 잃어야 했던 고통을 모르는 우리 세대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군대에서 혹은 학교 강당에서 보낸 단 하루의 기아체험이 인생에서 (생존과 관련된) 최대 고난일지도 모르는 세대가 불안한 내일이 두려워 군대에 입대했던 과거의 세대를 향해, 과연 '우리도 압니다. 힘드셨겠죠, 이해합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일부는 돈의 가치를 몰라 연연하지 않고 쓰는 것을 넘어 낭비를 하면서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고 돈을 펑펑 써대곤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그림자가 아닐까 싶다.
현세대가 기성세대의 업적에 눌려 감사하고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감사는 감사고 그네들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물려줬으니, 우리는 그 기반 위에서 삶을 어떻게 해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최대한 열심히 우리의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인도의 어두움 와 비교하며 우월감에 취하지도 말고 한국의 그림자를 지켜보며 절망하지도 말고..
여행자를 나누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인도를 여행할 수 있는 여행자인가, 아닌가’라고 한다. 그만큼 인도는 여행하기 쉬운 나라가 아니다. 인도를 여행하는데 불편한 점을 열거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도에 매력을 느끼고 그 매력을 잊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오는 것에 대해 여행 초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다르게 통용되는 상식 아닌 상식들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더러움 속에서 도대체 무얼 얻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우리는 여행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인도를 진정으로 즐기며 여행하기 위해서는 그냥 그 상황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는 것을, 떠나기 전날 밤에 서로 이야기하며 같이 공감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사는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지’, ‘왜 이렇게까지 해가며 장사를 해야 하는지’ 가 아니라 거기서 왜라는 의문은 떼 버리고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아, 돈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라는 연민이나 상대적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연스레 이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그 자연스러운 순응은 현재의 우리 자신들이 놓치고 살아온 것들을 돌아보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줬다.
다른 상식이 지배하는, 바라나시를 포함한 인도에서의 여행은 감사하지 못하고 지루하게 여기며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일상을 되돌아보게 해줬다. 이곳에서 여행이 아닌 진짜 삶을 한 달간 살아본다면, 누구나 한국이라는 사회로부터의 일탈로 인한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가치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입학도 빠르게, 졸업도 빠르게, 취직도 빠르게, 결혼도 빠르게.. 제대로가 아니라 무조건 좋게, 빠르게를 외치는 속도전의 트랙을 잠시 벗어나 보면 왜 빨리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것이 정말 '내게' 맞는 삶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길 것이다. 좀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내게 맞고 필요한 한국에서의 삶의 방식을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말한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고.
이번 여행은 나에 대해, 나의 삶에 대해, 그리고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해 ‘일과 생존투쟁에 얽매여 정신없이’가 아닌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과거 미래를 재지 말고 틀에 박힌 관념과 상식에 갇히지 말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삶을 불안 때문에 타의적으로 살지 말고, 현재 그 자체를 즐기며 살아야겠다는 터닝포인트를 주었다. 게다가 현재에 충실할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바라나시의 황금빛 강물이 그립다. 여행지가 여행지가 아닌 삶의 공간이 된다면 그것이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환상이 깨지는 대신 그만큼 내겐 실제적인 경험이 남을 테고, 그 경험들 중 하나가 또 다른 삶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