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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Feb 03. 2016

여행은 꼭 가야하는가?

#여행은왜가야하나요 ?라는 물음에 대하여..

6개월 정도 지나고 보니 내가 여행으로 얻은 게 뭔지,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을 왜 가야 하나요?' 라는 질문글에 '갔다 온 사람들도 좋다고 허세 부리기만 하지 정작 뭐가 왜 좋은지는 아무도 말  못해요' 라는 댓글을 보고 자극받아서 끄적여 본다.


1.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쉬워져서 삶이 간단해지고 정리다.


 나는 예전엔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참 어려운 사람이었다. 단적인 예로 뭔가 사거나 얻게 되면, 이게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쓸지를 몰라 2년,3년을 쟁여놓다가, 나중에야 쓸 일이 생기면 버려두지 않길 잘했다고 정신승리하던 사람이었다.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원론적으로 따져보면 결국 삶의 가치 순서를 모르니까 생기는 문제였다.

 전에도 한번 끄적였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돈으로 다 때우는 여행이 아니라면) 빠르게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자주 맞이한다. 며칠 후에 몇 시, 무슨 차를 타고 어디로 이동을 할 건지, 그래서 이도시에는 며칠 있을 거고 그동안 뭐부터 볼 건지, 당장 어디에 가서 자야 하는지, 이 물건을 지금 당장 여기서 살 건지 등등등.. 돈에 그리고 시간에 절절매며 여행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항상 추구했어야 했고, 결국 그러한 의사결정 과정이 삶에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면  이후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추측할 수 있고, 내 체력에 대해,감정에 대해, 그리고 내 의지에 대해 계산이 서기 시작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들이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하나 정하면, '나는' 그 가치를 위해 무얼 꽉 쥐고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은 미련이 남더라도 주저 없이 놔버려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지금 놓지 않으면 결국 쥐고 있어야 할 것도 못 쥐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입대하기 전에는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의방 제대한 후에는 일단 뭐든 해보자고 무모하게 들이받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하고 싶다는 순간적인 충동이 들어도 내가 지당장 이걸 꼭 해야 하는지가 확실하지 않거나, 없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접어버릴 줄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충동을 다스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배우고 있다.


2. 사람들을 만나서 할 얘기가 많아지고, 남을 이해하는 게 쉬워졌다.


 전에는 책으로만 배운터라 주관과 고집강해서, 남들에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는 걸 명확하게 표현하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젠 나 자신이 좀 더 확실해지다 보니, 주관을 확실하게 드러내야 하는 부분과 주관 내세우며 잘난 척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고 좀 더 유연해지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지고 다른 의견이라도 날 세우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 같다. 단순히 여행 에피소드가 많아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할 때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더욱이 남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다 보니, 소통에 있어서 나의 어떤 면때문에 남들이 상처받고 불편해 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그런 부분들을 더 조심하게 되었다. 여전히 서툰면이 있지만,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 남들 불편하게 했었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는 걸 느낀다.


3. 일상을 좀 더 감사하게 됐다.


 일 년간 싸돌아 다니다 보니, 만나서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 매일 얼굴 보고 얘기하는 가족들과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여행 중에 머무는 도시에서 짧은 동안 의미 있는 기억들을 남기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내가 주위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역시 제한적이므로 옆에 있는, 있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잘보이려고 신경 쓰기보다 바로 정작 자주 얼굴 보고 교류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더 신경 쓸 줄 알게 되었다.
 또한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아 느리지만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구경한다거나,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본다거나, 매일 다니는 길이 어제와는 뭐가 달라졌는지 찾아본다거나 하는,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상소소 재미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 지지기반이 되는 사람들과 일상들에 신경 쓰고 감정을 쏟다 보니 삶이 좀 더 풍요로워다. 새로운 일들을 찾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이에나처럼 새로운 행복과 행운을 찾아야 삶이 풍요로워질 거라고 믿으며 살았을 때보다 더 안정되고, 웃을 일이 많아졌다.


4. 불편한 것과 불행한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됐다.


 먼저 불편과 불행은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걸 먼저 말해둬야 할 것 같다. 남들에겐 불편한 게 내게는 불행일 수 있는 거고, 남들에겐 불행인 것이 내겐 단순히 불편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겐 먹을 음식이 없는 건 불행한 거고 뭘 먹을지 선택할 수 없는 건 불편한 거다. 정말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거든, 토요일 일요일은 상점이 문을 열지 않아서 먹을 것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든,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먹을 게 있는데 선택권이 없는 건 불편한 거지 불행은 아니더라. 그래서 '불편'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오히려 쉽게 불평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고, 감사하게 되더라.
 꿈이나 성취에 대해서도 비슷한데, 열정을 쏟고 몰두해서 시간 보낼 꿈이나 보람 느낄 성취가 없는 건 불행한 거지만, 그 꿈이나 성취가 대단하지 않거나 사소한  것일지언정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 불행하다고 징징댈 필요는 없더라. 오히려 그럴 때, 초심을 돌아보며 자존감을 지키는 법도 배우게 되더라.


5. 여행 덕분에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서른 살이라고 유통기한을 정해둔 버킷리스트들이 있다. 그 끄적여놓은 것들을 다 이루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일들을 목록으로 정리해 둔 덕에, 한 텀이 끝나고 뭘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됐다. 여행 자체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그걸 이룬 덕에 다른 목록들을 지우는 발판으로 써먹을 수 있게 됐다.

 꾸준히 찍고 매일 정리한 덕에 3만 장의 사진을 100여 장으로 추려 엽서도 만들었고, 설 연휴가 지나고 계약이 마무리되면 직접 팔아볼 수 있게 됐다. 개인 사진전을 해보고 싶다는 걸 목록으로 써놨었는데, 판매 목적이긴 하지만 엽서를 진열하는 걸로 얼추 대신할 수 있게 됐다. 또 누가 알겠나 돈이 생각보다 잘 벌리면 진짜 전시회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아직 계약서를 문서로 쓴 건 아니지만, 북유럽 싸돌아 다닌 덕분에 저자 타이틀도 한번 달아볼 수 있게 됐다. 얼마나 좋은 글이 나올진 모르겠지만, 결과를 떠나서 열정 쏟아서 뭔가 글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여행이 아니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위에서 말한 경험들은 일상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시대비 같은 기간에 보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결과물을 내려면 여행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여행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여행에도 적합한 때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겠고 경험이 더 필요하다는 자극을 받게된다면,  때 가장 좋은 선택은 여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준비가 되면 된대로 안되면 안된대로,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일상을 지킬 추억과 경험을 그득그득 담아올 수 있는 게 여행이니까.
 열꽃같이 피었던 세계여행 상사병은 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잔병치레 중인 여행 병자로서 앞으로도 이 자극은, 감기처럼 가끔은 독감처럼, 때 되면 항상 아프게 하는 자극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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