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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Sep 26. 2015

#3 적응, 세계일주를 꿈꾸다. (140420)

호주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330일간의 세계일주

#3 적응, 세계일주를 꿈꾸다. (140420)


# 이제 좀 일이 손에 익는다. 도착한지 삼 일만에 일자리 구한 건 참 신기한 일이라고 주변에서들 그런다. 이것만 한 달 내내 꼬박 해도 한 달에 최소 2500불 정도는 될 테니까, 생활비는 일단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다 :) 아침 7시에 나가서 보통 돌아와서 씻으면 4시 정도. 아침은 대충 먹고 늦은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하다 보니까 두 끼 정도 먹게 된다. 하루 종일 팔 움직이니까 자연스럽게 쪼꼼씩 근육은 붙고, 투입되는 게 없으니까 뱃살은 빠지고 있다. 일례로 바지가 점점 안 맞기 시작한다... 벨트가 없으면 골반에 걸치고 다니는 수준. 살 빼려면 역시 일하고 고생하는 게 최고인 듯ㅋㅋ


다섯시간이 넘어가면 정말 던져버리고싶은 너.


# 여기는 오늘이 이스터데이라고 해서 부활절 기간인가 보다. 모든 가게는 거의 다 문을 닫았고, 황금연휴인지라 청소해야 하는 모텔은 방 50개 중에 44개가 찼고, 덕분에 남들 놀 때 일하는 나는 4시간 일하고 10만 원을 벌었다. 엊그제 이스터데이라고 일하는 사람들 한데 모아놓고 사장이 소고기를 쐈다. 정말 원 없이 먹었다. 내가 한국에서 먹은 건 뭐였나 싶더라... 그 자리에서 뵈었던 40대 사장과 50대 실장은 경험이 얼마나 사람을 성장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분들이었다. 얼마나 많이 배웠든, 얼마나 학력이 높든,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이 아니라 많은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부딪혀 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임감과 성실함 두 가지면 먹고사는데 큰  문제없을 거라는 말씀이 참 여운이 남는다.


# 어제는 마트에 갔다가, 캥거루 고기 파는 걸 봤다.. 세상에 정말 있었다니.. 캥거루 고기 ㅋㅋㅋㅋ 처음엔 내가 단어를 잘못 본 줄 알았다. 옆에 있는 T를 붙잡고 이거 캥거루 고기 맞냐고 먹어봤냐고 어떠냐고 흥분해서 물어봤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맛없어요."  인도에서는 들소 고기를 팔았었고 아프리카에 가면 사자고기를 판다고 하던데 가기 전에 꼭 캥거루 고기 먹어봐야겠다. K는 어제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속담을 몸소 실천하고는 오늘 시드니로 부랴부랴 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그의 투 블럭 머리가 기대된다 ㅎㅎ 지금쯤 돌아오는 길일텐데, 밥은 먹고 다니니?


# 아 어제 처음으로 뉴캐슬 항구에 가봤다. 저녁노을 지는 해변가를 찍고 싶었는데,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이 참 예쁘더만 도착하니까 고새 해가 졌다. 몇 장 찍어둔 게 있지만, 맘에 안 든다. 왠지 모르게 스플릿 생각이 났다. 항구도 하늘도 그곳이랑 비슷해 보였다. 결국 드라이브로 끝난 3시간 동안 K와 참 많은 얘기를 했다. 많은 얘기를 들었고 많은 얘기를 했는데, 인도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것들 말하면서 내가 8개월 동안 이곳에서 해야 할 것, 그리고 그 이후에 하고 싶은/해야 하는 것들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번엔 낚시를 하러 가서 밤새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보고 싶다 :)


밤마다 항구로 드라이브 하던 시절. <호주 뉴캐슬>


<크로아티아 스플릿>


# 한인마트에서 시킨 물품들이 오늘 왔다. 오징어 채를 하려고 오징어채를 주문했는데, 건오징어가 왔다 ㅡㅡ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건오징어로 무슨 반찬을 해먹지.. 결국 지금 라면 끓이고 있다. 망할 이스터. 주말이든 공휴일이든 그리고 어디서든 쉽게 생필품을 살 수 있는 한국은 소비자입장에서는 정말 살기 좋은 나라다.(휴일에도 쉬지않고 일하시는 한국인들에게 감사와 찬양을) 어제는 옥수수를 삶아 먹는다고 손질해서 냄비에 물 붓고 넣어놨다가. 새까맣게 까먹고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생각이 났다. 넷다 어쩜 그렇게 까먹을 수가 있는지.. 한쪽 부분이 탄 군옥수수를 먹는 기분이었는데, 그냥 삶은 옥수수와는 또 다른 식감과 맛이었다. 지난번에도 끄적였지만,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옥수수는 먹어본 적이 없다. 소금도 설탕도 단 한 스푼도 안 넣었는데도 왜 이렇게 단 거지?! 10불짜리 냄비를 비록 날려먹었지만, 우리는 귀중한 야식거리를 찾았다


# 매 연말이 되면 그 한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사람들, 내게 신경 많이 써주고 챙겨줬던 고마운 사람들/ 내가 많이 눈에 밣혀서 챙겨줬던 사람들/ 오랜 시간  함께했던 사람들/ 앞으로 더 알아가고 싶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직접 찍은 사진 뒤에다가 손편지를 써서 주곤 했었다. 여기서도 생각 나는 대로 엽서처럼 몇 마디 적어서 연락 주고받고 싶은데, 막상 보내려니 주소도 모르고 민망하기도 하다. 내 옷장위 상자에 어릴 때부터 받아온 모든 편지를 모아놨는데, 여기서도 한 박스 만들어가면 좋겠다.


# 오늘 일하면서 느낀 거지만, 입 밖으로 혹은 손밖으로 내미는 그 순간 모순이 되어버리는 말/글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겸손하다. 의식하지 않는다. 대답 안 한다.


# 출퇴근하는 차에서 읽는 노인과 바다는 결국 오늘 끝이 났다. 신기한 건 2/3가 지나는 시점에서도, 노인은 고기를 잡지 못했다는 거. 오랜만에 이렇게 재밌게 읽은 소설은 오랜만이었는데, 다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평이 많았던 소설 같았는데, 내겐 뭔가 고전으로써의 의미보다 읽는 내내 재밌는 소설이었다. 물고기와 힘겨루기 하는 내내 혼잣말을 적어놓은 것과 동시에 의식의 흐름대로 노인의 생각을 적어놓은 게 의외로 몰입도가 좋았던 거 같다.


# 혹시나 해서 들고 온 '세계일주 바이블'을 자꾸 만지작 만지작하게 된다. 1년 여행 경비 3천.. 여기서 8개월 일하면 충분히 벌텐데.. 연말에 가려했던 남미 여행으로는 성이 안찰지도 모르겠다. 내년에 졸업하겠다는 목표가 흔들린다 ㅋㅋㅋ 어느 역마살 제대로 낀 사람이 이런 책을 냈을까..


# 이 글 쓰느라 저녁 설거지는 내 몫이 되었다.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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