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카드 한 장의 마법

"술 마시고 고백, 호 or 불호"라는 질문이 만든 뜨거운 토론

by 류이음

종이 한 장이 사람을 여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알았다.


카드를 올려놓기 전까지 바는 침묵의 영토였다. 네 명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각자의 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곳에 있지는 않았다.


내가 한 일은 종이 한 장을 카운터 위에 놓은 것뿐이다.


손 글씨였다. "술 마시고 고백. 호 or 불호?" 누군가 집어 들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그 목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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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호요. 무조건 불호." 단호했다. 술 기운에 한 고백은 다음 날 후회가 된다고. 자기가 그랬다고. 소주 두 병 마시고 전화를 걸었는데 다음 날 통화 기록을 보고 죽고 싶었다고.맞은편에서 고개를 저었다. "호요." 술이 아니면 못 꺼냈을 말이 있다고. 자기는 술자리에서 고백을 받았는데 그게 시작이었다고.


웃음이 터졌다. 한숨이 섞였다. 건배가 이어졌다.


5분 전까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답이 있는 질문 앞에서 사람은 조용해진다. 틀릴까봐. 하지만 정답이 없으면 자기 인생이 곧 근거다. 직함도 필요 없다. 연애를 해봤으면 참전할 자격이 있다. 누구의 밤이 더 처절했는지 겨루는 게 아니라 각자의 밤을 꺼내놓는 것이다. 그 차이가 크다.


나는 그 장면을 지켜봤다.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손짓이 커지고 있었다.


카드를 만들 때 오래 고민했다. 너무 가벼우면 웃고 끝난다. 너무 무거우면 입이 닫힌다. 그 사이 어딘가. 웃기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지는 지점. 연애라는 주제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술김에 전화를 건 적이 있다. 혹은 걸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 보편성이 낯선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매번 손 글씨로 썼다. 인쇄하면 온기가 사라질 것 같았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오히려 경계를 낮춘다. 완벽한 것은 거리를 만들고 불완전한 것은 틈을 만든다. 사람은 틈으로 들어온다.


그날 네 사람은 두 시간을 떠들었다. 헤어질 때 한 사람이 물었다. "이거 누가 쓴 거예요?" 내가 손을 들었다. "다음엔 더 어려운 거 내주세요." 그 사람이 웃었다.


카운터 위에 오늘도 카드 한 장이 놓여 있다.


침묵은 질문 하나로 끝난다. 매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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