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손님을 향해 건네는 최선의 환대
잔은 비워지면 다시 채울 수 있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부산에서 출장을 왔다는 여자가 있었다. 호텔 방에 혼자 들어가기 싫어서 왔다고 했다. 카운터 끝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첫 모금을 삼키고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안다. 수백 번 봤으니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일 때문에 잠시 서울에 오신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 손님이 끼어들었다. 부산이요? 저도 부산인데요. 그 한마디에 공기가 풀렸다. 해운대 말고 광안리가 진짜라는 말이 나왔고 돼지국밥 논쟁이 시작됐다.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가 가장 오래간다.
세 사람이 됐다. 나와 그와 옆자리 손님. 이름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부산이라는 단어 하나가 명함보다 빠르게 사람을 연결했다. 같은 도시를 기억하는 몸들은 설명 없이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두 시간 뒤 그 여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커졌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사람은 편해지면 앞으로 기운다. 경계하면 뒤로 젖힌다. 나는 카운터 안쪽에서 그 각도를 본다. 어깨의 높이와 등의 기울기로 오늘 밤이 성공인지 아닌지를 읽는다.
나가면서 악수를 했다. 서울 오면 꼭 다시 올게요. 손이 따뜻했다. 나는 웃으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녀는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았다는 말에는 여러 뜻이 있다. 서울에 출장이 없었을 수도 있다. 바빠서 잊었을 수도 있다. 혹은 그날 밤이 너무 좋아서 기억 속에 그대로 남겨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완벽한 것은 반복하면 깨지니까. 나는 세 번째를 믿기로 했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다시 올 손님에게만 집중하라고. 재방문율이 매출을 만들고 단골이 가게를 살린다고. 숫자로 따지면 맞는 말이다.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 탓에 그럴 수가 없다.
그리고 앞에 앉은 사람이 내일 다시 올지를 어떻게 아는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까 모두에게 같은 온도를 건넨다. 진심에 등급을 매기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심이 아니다. 계산된 친절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균열이 생긴다. 사람은 그 균열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한 번 오고 사라진 사람이 밖에서 누군가에게 말한다. 강남에 괜찮은 바가 있더라. 그 한마디가 내가 만난 적 없는 사람의 발걸음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순환이다. 장부에 적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바를 지탱하는 힘의 상당 부분이 거기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부산으로 돌아간 그 여자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옆에 앉은 사람이 같은 동네 출신이어서 두 시간을 떠들었다고. 사장이 먼저 말을 걸어줬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서울에 올 일이 생겼을 때 이 바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렇게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사람에게도 나는 똑같이 먼저 말을 건다.
인연은 직선이 아니라 물처럼 흐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멈추지 않는다.
맞지 않아서 다시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안다. 이 바의 분위기가 싫다기보다 본인의 결과 맞지 않았을 수 있다. 술자리에도 체질이 있다. 시끄러운 곳이 좋은 사람이 있고 조용한 곳이 좋은 사람이 있다. 우리 바가 모든 사람의 정답일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사람이 앉아 있던 시간만큼은 내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처음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시 올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을 정직하게 만든다.
다시 올 수 없는 사람에게 건넨 진심은 결코 허공에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어딘가에 묻어서 함께 나간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거리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질지도 모른다. 그거면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