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아닌 결핍을 주문하는 밤

by 류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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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 끝. 벽에 가까운 쪽. 시키는 것도 늘 같았다. 위스키. 스트레이트. 얼음 없이. 잔을 입에 대는 속도도 일정했다. 마시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어느 수요일에 바에 들어오더니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을 펼쳤다는 것 자체가 신호였다. 석 달을 같은 것만 마신 사람이 글자를 읽고 있었다. 눈이 칵테일 쪽에 머물렀다. 분홍색 이름들. 과일 이름이 들어간 것들. 그가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피치 크러시 하나 주세요.


나는 되묻지 않았다. 복숭아 퓌레를 꺼냈다. 보드카를 재고 라임을 짰다. 잔에 따르니 연한 주황빛이 올라왔다. 그가 위스키를 마실 때와 다른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홀짝였다. 눈을 한 번 감았다.


그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은 복숭아 맛이 먹고 싶었던 게 아니다.


단맛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루가 너무 써서.

바를 오래 하다 보면 주문에서 하루가 읽힌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이 잔 위에 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취향대로 술을 고른다고 믿는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매번 위스키를 고르는 것은 아니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이 매일 매운 것을 찾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혀는 기분에 연결되어 있다. 기분이 바뀌면 혀가 원하는 것도 바뀐다. 아니 혀가 아니다. 몸 전체가 부족한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메뉴판의 이름을 읽지 않는 손님들이 있다.


오늘 좀 지치는데 위로 되는 걸로 주세요.

따뜻한 거 있어요? 안에서부터 녹는 것 같은 거.

색깔이 예쁜 걸로 하나만요. 오늘 눈이 심심해서.


처음에는 당황했다. 메뉴판에는 이름과 가격이 적혀 있지 감정은 적혀 있지 않으니까. 위로가 몇 밀리리터인지 나는 모른다. 따뜻함의 레시피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몇 번 겪고 나니 알았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맛이 아니라 온도였다.

사람의 하루에는 색이 있다. 어떤 날은 회색이다. 어떤 날은 까맣다. 드물게 노란 날도 있다. 회색인 날에 회색 술을 마시면 가라앉는다. 그날 부족한 색을 잔 위에 올려야 뜬다.


독한 술만 마시던 사람이 달콤한 칵테일을 시키는 밤. 그것은 취향이 변한 게 아니다. 하루의 결핍이 손끝으로 나온 것이다. 입이 시킨 게 아니라 하루가 시킨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배운 뒤로 잔을 만들 때 재료를 먼저 보지 않게 됐다. 사람을 먼저 본다.


어깨가 처져 있으면 잔에 밝은 색을 담는다. 말이 빠른 사람에게는 천천히 녹는 술을 내놓는다. 속도를 줄여주기 위해.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양복 차림의 남자가 카운터에 앉았다. 넥타이를 아직 풀지 않은 상태였다. 앉자마자 말했다.


제일 달콤한 거 주세요. 제일 예쁜 색으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본인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딸기와 리치를 섞었다. 위에 민트를 올렸다. 잔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힘든 한숨이 아니었다. 놓아주는 한숨이었다. 하루를 버텨낸 몸이 겨우 내려놓는 소리. 공기가 빠지는 것처럼 조용했다.


고맙습니다.


술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그 색깔에 대한 것이었다. 하루 종일 형광등 아래 모니터만 보다가 분홍빛을 만난 눈이 쉬고 있었다.

쉐이커를 흔드는 일은 재료를 섞는 일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얼음과 알코올과 시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물리적으로는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오래 흔들다 보면 다른 것이 느껴진다.


내가 섞고 있는 것은 보드카와 라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오늘과 그 사람에게 부족한 내일이다. 단맛을 넣는 것은 설탕을 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하루에서 빠진 다정함을 채우는 것이다. 얼음을 빼는 것은 온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루 종일 견뎌야 했던 차가움을 녹이는 것이다.


바텐더는 술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결핍을 계량하는 저울이다.


저울은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대략이면 충분하다. 사람의 결핍은 밀리리터 단위로 측정되지 않는다. 다만 방향은 읽어야 한다. 이 사람이 지금 차가운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 따뜻한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지. 그 기울기를 읽고 반대쪽에 무게를 올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가끔 틀린다. 밝은 색을 내놨는데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안다. 이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색이 아니었구나. 다시 읽는다. 다시 섞는다.

그날 피치 크러시를 시켰던 사람은 다음 주에 다시 왔다. 카운터 끝에 앉았다. 벽에 가까운 쪽.


위스키 스트레이트요.


돌아왔다. 그의 일상이. 그의 취향이. 지난주의 달콤함이 그 사이를 메워준 것이다. 부족했던 색이 채워졌으니 다시 원래의 것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취향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결핍은 그 사람에게 모자란 것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좋아하는 것은 반복할 수 있다. 모자란 것은 채워지면 사라진다.


그래서 어떤 주문은 한 번뿐이다. 다시 오지 않는다. 그 밤에만 존재했던 결핍이었으니까.


메뉴판에는 술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하지만 손님이 진짜로 주문하는 것은 이름이 없다.


나는 오늘도 쉐이커를 든다. 안에 넣는 것은 재료다. 하지만 흔들면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다. 이 잔이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기를. 한 모금만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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