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비즈니스 스트레스가 가져다주곤 하던 다이내믹스, 푸르고 투명했던 나만의 향수 Bvlgari, document에 친필 사인을 하는 용도 말고는 전혀 쓸 일이 없었지만 무슨 부적이라도 되듯 꽂고 다녔던 몽블랑.. 그 만년필은 도대체 몇 개나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빼어난 계절의 추억, 빼어난 산하의 추억, 빼어난 도시의 추억, 빼어났던 동료들과의 추억, 그리고 지구가 좁다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날아다니며 추진했었던 글로벌 프로젝트들의 추억. 가끔은 생각이 난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의 대기가 온통 하얗기만 한 계절이 반년이나 지속되는 이곳에선 가끔씩 그리운 것들이 있는 거다. 향수를 쓰는 사람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한,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이 참 부담스럽기만 한 캐나다의 이런 소박한 타운에 살다 보면 가끔씩 그리워지는 게 있는 거다. 색, 향기, 그리고 인생의 어떤 순간들에 느닷없이 찾아오곤 했던 그 craziness.. 하지만 십 년 아니 오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난 지금의 소박하고 한가로운 내 모습을 그리워할 것이 뻔하다.
시월이 와서 아름다운 것들이 어디 붉은 나뭇잎들 뿐이랴.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잎의 곁에 자랑스러운 결실이 자리한다. 아직은 푸른 잎들이 盛夏의 계절을 추억하고 있지만, 질 때를 아는 것은 종의 지속적인 번성을 위해서 수반되어야 할 결정적 덕목일 것인데 인간들만은 그 어쩔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물어감에 대한 극심한 저항을 보이며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 나댐이 무색하게도 누추하고 옹색한 모습을 자주 내보이곤 한다.
올해 여름은 카누와 수영을 하느라 골프는 거의 안 하고 지나가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오면 필드에 나가 천천히 걸으며 여름을 추억해야 한다. 여름의 추억이 뜨겁고 강렬했을수록 나무의 잎새들은 더욱더 붉게 타오를 터..
내게 골프라는 운동은 도시에 살면서 자연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손쉬운 수단일 뿐이다. 공이 러프에 빠질수록, 그린을 넘어 뒤편 숲으로 날아가 버릴수록, 또 OB가 나서 어디론가 공이 날아가 버릴수록 내 즐거움은 더 커진다. 같이 게임을 하는 이들이 날 이해하기 힘든 건 당연하다.
앞 팀의 플레이가 지체되어 Marshal까지 들락거리며 조속한 플레이를 종용했지만 앞팀은 여전히 느렸다. 한떼의 갈매기들이 Fairway에서 노닐고 있었고 마침 옆으로 지나던 한 녀석에게 난 장난꾸러기 사내아이처럼 쫓아 달려들어 날려 보내면서 녀석의 박력 있고 아름다운 날개 짓을 담아 본다.
생명이 다해 무채색으로 말라비틀어져 가는 야생초의 어느 한 부분에서 씨앗이라는 대단히 진보적 형태의 생명이 동시에 영글어가고 있다. 수천 년 전 화재로 다 타버린 새카만 곡식 낟알에서 싹이 트는 모습을 가끔씩 보며 우린 무슨 생각이 드는지.. 가장 풍성한 계절이지만 동시에 다음 세대의 더 큰 풍성함을 위해 지금의 그 화려한 주인공들은 마지막 찬란한 색을 발하며 사라져 가야 할 悲感한 시간이기도 하다.
보라색의 야생 들국화. 누구 하나 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들국화는 저리 아름답고 귀족스럽기 까지 하다.
인생을 살면서, 황홀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오늘과 같이 옅게 물들어가는 나무들 사이로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 때면 어쩔 수 없이 황홀해질 수밖에 없다.
원래 호기심 많고 활달한 다람쥐는 입에 잔뜩 먹이를 물고 선 숨겨 놀 곳을 찾아 달음질친다. 녀석은 겨우살이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열매들을 이곳저곳에 모아 놓지만 정작 먹어야 할 때 어디다 숨겨 놨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고 한다. 귀여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