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 shin May 15. 2016

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길은 시작되고

Peter @ 금수강산

강을 지나고 산을 지나며 자정이 가까워 올 즈음까지 계속 달려가다 보면 문명 생활을 위해 헤어 무스로 빳빳이 다려졌던 머리카락들 역시 찬 바람을 제대로 맞아 자연 상태의 부스스함과 더부룩함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동시에 내 마음은 회사 생활의 모든 사회적, 조직적, 그리고 인간적 constraints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금수강산의 일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현란하고 복잡했던 도시의 중심을 빠져나가며 밤공기는 점차 산소량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어슴프레 하던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면, 지프의 문짝을 뜯어내고 지붕을 벗겨 냄과 동시에 나 역시 넥타이를 풀고 흰 와이셔츠를 체크무늬 두터운 모직 셔츠로 갈아 입고 있었다.

내 아지뜨였던 청담동 xx 카페에서의 동료들, 친구들과의 와인 파티가 가지는 유쾌한 왁자지껄 함도 뒤로 하고..

달빛을 받으며 별빛을 받으며 어디론가 향해가는 나의 지프는 뮤직 스튜디오 공간으로 변해 David Bruback을 만나고, Queen을 만나고, Bach 할아버지도 만나고, Kings Singers를 알현하기도 하고 또 조수미의 열정에 취하기도 했다.

어떨 땐 이문세 가락에 눈물도 찔끔거리고 박 화요비의 애타는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 거리기도 했다.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 보아요.. 끊임없이 달리는 지프는 대기의 기운을 그대로 호흡할 수 있는 온전히 개방된 공간이 되고, 인간이 유사 이래 추구해온 속도에 대한 도전장이 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온몸으로 온 얼굴로 맞이할 수 있는, 그래서 제 속도를 내고 달릴 때면 내 몸뚱이가 풍동 시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오롯이 나만의 공간에서 이 듬직하고 씩씩한 무쇠 말을 달리다 보면 난 이미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 들어서고 있었고, 익숙한 이름의 산 정상, 혹은 능선을 기어오르고 있었던 거다.

캄캄한 밤, 숲속과 계곡을 천천히 지나면서는 지붕이 개방된 지프 속으로 온갖 곤충들이 낙하산처럼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신비한 곤충과 풀의 나라로 들어온 피터가 그저 어린아이처럼 좋아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한 겨울 그믐 즈음, 눈이 펄펄 나리는 날에 달릴라 치면 양털 스웨터 두 개에 파카를 입고 그 위에 또 스키 파카까지 입어야 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그 위에 또 벙어리 장갑을 껴야 했고 얼굴을 온통 가린 눈만 빼꼼한 털모자에 고글까지 써야 했다. 그리곤 windshield를 접어 내린 채 내 달렸다. 눈 오는 영하 10도 길을 130km 이상으로 달리면 체감온도는 영하 30도 40도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달리다 DMZ 아래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민통선(민간통제선)을 만나면 돌아섰다. 우리는 남쪽으로 달리다 한국의 최남단 땅끝 마을을 만나면 돌아섰다. 우리는 서쪽으로 달리다 우리의 놀이터 탱크 훈련장으로 진입해 즐거웠고, 우리의 동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당시 오프로더들의 聖地인 갑둔과 방태산 그리고 오대산이 있었다.

이런 철마 들을 몰며 산하를 누비는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짐작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주로 해외를 돌아다니며 일하던 때라 난 한국으로 돌아오면 크게 바쁜 일이 없었는데, 매년 받아오던 회사의 스톡옵션을 팔아 산 Jeep를 시작으로 한국산 변형 지프 등과 함께 3대의 랭글러와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등을 거치며 활동을 해 왔었다. 요즘엔 동호회들이 너무 많아졌지만 당시엔 수십명 정도로 다들 서로 잘 알고 지내며 튜닝을 연구하면서 부품까지 직접 제작해 장착하곤 했던 한국 오프로드의 일 세대였다.

야생마가 뛰어놀던 넓고 아름답던 강원도의 오지 갑둔은 조그마한 초등학교에 아이들 목소리가 사라지고 마을의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가서는 이젠 말 대신 탱크들이 뛰어노는 기계화 전술 훈련장이 되었다.  

탱크들을 모는 전차병들과 눈인사를 해가며 지프를 종횡무진 野地를 누비는 서부 시대적 기분은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가득한 흙냄새와 풀 냄새. 그래서 내 몸안에서, 내 가슴 한가운데서도 마구 피어나는 듯한 그 자연의 향기가 너무 좋았다. 그 옆엔 우리의 高地 1,200m의 구룡덕봉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정상에서 바라본 태백의 준령들은 우리 사나이들 가슴에 굵은 선을 다시 긋기에 충분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ㅁㅁ천을 지나 찾아 들어가는 밀림 지대에서는  밤새도록 지저귀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달빛의 정기를 받아 흐르는 차디 찬 계곡 물의 울림으로 하여 내 마음속 풍경을 밤새도록 울리도록 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에서의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여정 도중에는 오일장(五日場)이 섰고 삼일장도 섰었다. 작지만 정이 넘치는 재래시장을 돌아보며 사람을 느끼며 삶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발가 벗겨진 닭 몇 마리를 사기도 하고, 통마늘 한 줌과 막 소주 몇 병, 정육점에서의 썰어진 두터운 삼 겸살 한 부대, 그리고 굵은소금 정도가 우리의 식량이었다. 장마에 떠내려온 통나무를 도끼로 패어 장작불을 지피고 강물을 퍼다 닭과 마늘을 넣어 그저  펄펄 끓여 닭백숙을 해 먹으면 더 이상 구수 할 수 없었다. 두텁게 썬 삼겹살은 덤불과 장작불로 달궈진 커다란 편평한 바위 위에서 기름이 쏙 빠진 채로 자글 자글 익었고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계곡물이 바짝 마른 바위 계곡을 오르는 과정은 또 다른 묘미였다. 온몸과 머리가 상하좌우로 요동치며 흔들렸는데 튼튼한 헬멧은 필수였다. 이런 지형을 두어 시간 지나다 보면 과격할 정도로 원활한 내장 운동으로 인해 바로 시장끼가 들었다.

강가나 바닷가로 갈 적에는 별 다른 음식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스쿠바 멤버들이 팔뚝 만한 끄리나 쏘가리를 건져 올렸고 간혹 솥뚜껑만 자라도 들고 나왔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 달빛을 받으며 강물속에서 불쑥불쑥 한명씩 일어서며 물고기들를 어깨에 잔뜩 걸머 지고선 온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어 나오는 우리 스쿠버 친구들의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 코믹하기 까지 했는데, 횟집 주방장이 혀를 내두들 정도의 칼놀림으로 꺽지의 회를 뜨고 쏘가리의 회를 떴다.

스카치와 함께하는 깊고도 상쾌한 새벽 공기 속, 아름다운 달빛 아래서 사나이들과의 대화와 함께했던 한점 한점 고기와 물고기 회는 아무리 돈으로 호사를 부려 사려해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메뉴였던 것이다.

엔진이 차체 프레임에서 뜯겨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핸들이 부서져 산 꼭대기에서 조향이 전혀 되지 않는 차를 뒤차가 뒤에서 끌어당기며 내려오기도 하고 차 엉덩이가 진흙 웅덩이에 완전히 빠져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밤새 윈칭으로 겨우 빠져나오기도 하고.. 하지만 다음날 아침엔 언제 그랬냐는 듯 녀석의 본닛은 깨끗해져 있곤 했다.

얼음이 유리 같이 얼어붙은 절벽 꼭대기 길에서 지프와 같이 굴러 떨어질 뻔도 하고 엄청난 여름 장맛비에 2m 앞 길이 유실되어 그 앞에서 바로 서지 앉았다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하기도 했지만 그저 좋았다. 정말 즐거웠고 스릴이 넘쳤다.

폐교 수위실에서 폐 자재와 같이 뒹굴며 괜히 꺼낸 귀신 이야기로 벌벌 떨며 자면서도, 영하 20도의 눈폭풍 나리는 깊은 계곡 속 지프 안에서 번데기처럼 침낭 속에 들어가 고꾸라져 잠을 청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즐거웠고 언제나 상쾌한 아침을 맞았었다. 철없이 즐겁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화절령에도 봄이

이른 아침 새벽안개를 뚫고 올라선 그곳에는

이제 막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가 뿌려지고 있었고 장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맥을 온통 감싸는 안개는

태백 준령의 신령스러운 기운이었다.


우리는 하늘과 많이 가까이 있을 수 있었고

음모와 살기, 기만과 술수로 가득 찬 인간시장에서

잠시나마 멀어질 수 있었다.


거의 일 년 여 만에 나선 트레일이었다.

나의 벗 폭탄과 오랜만에 함께 한 길이었기에

설렘과 흐뭇함이 더했다.

영월을 거쳐 함백으로 올라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바로 화절령 트레일이 시작되었다.


이제 막 진달래가 피고 있었고

버들강아지와 연 초록 잎새가 피어 나오고 있었다.

흙 향기, 잎 향기, 온통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바리케이드는 손상시키지 않았다.

뒤돌아 찾은 좌측 길은 통과가 가능했다.

바위로 막아놓은 길을

누군가가 치워 놓았던 것이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벼락을 맞고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또 누군가가 그때마다 솜씨 좋게 길을 터놓았다.

아마도 이름 모를 오프로더가

조용히 작업을 했으리라.


좌측 도어는 연신 나뭇가지와 몸싸움을 한다.

지프 천장의 캔버스는

쓰러진 고목의 사지에 긁히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앞서가는 폭탄의 탑차 천장은

나뭇가지와 방금 난 잎들이 소복이 떨어져 쌓여

마치 작은 정원 같은 모양새를 하고 달린다.


삼판길 가운데에는 바퀴 자국을 피해

샛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다.

향기, 소리, 색, 바람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는 우리의 속도..

너무나 아름답다.


폐 갱도의 아픈 상처를 지나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고사목을 지나

우리는 사북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났다.

그곳 역시 바리케이드가 있었고

우리는 약간의 정리 작업을 한 후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으로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밟고 지날 수밖에 없었다.


태백으로의 진행로가 확인되지 않아

사북 길이 아닌 쪽을 택해 진행하기로 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기온은 아열대 수준으로 올라있었고

주변은 온통 초여름의 푸르름으로 가득 찬

숲으로 변해 있었다.


폭탄의 환성이 무전을 통해 흘러나온다.

배꽃 좀 봐!

눈 부시게 새하얀 돌배꽃이

백 년은 넘었음직한 커다란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주변의 경사진 메밀밭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수도 없이 피어 있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렸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뭉게구름이 둥실 솟아 있었다.


태백준령의 산자락 아래에는

그렇게 소담스러우면서도 뜨겁게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계곡 길에 이름을 지어 주었고

자주 찾기로 다짐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 얼마나 정겹던지

농부가 걸어가는 정도의 속도로 내려왔다.


마음이 깨끗해져 감을 느꼈다.

작년까지도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렸을..

하지만 이제는 폐교되어 버린

작은 산골학교를 지날 땐

지난 어린날들의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소가 걸어가는 속도로 내려오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곳을 지나

우리가 가장 지겨워하는

미끈하게 뻗어있는 국도로 복귀했다.


우리나라는 이제 까지 내가 경험하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했다.

Cheers.


매거진의 이전글 팔월의 서울 -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