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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shin Dec 09. 2019

좀 더 혜안이 깊어졌으면..

biking@lakeshore.toronto

바다 같은 온타리오 호수를 끼고도는 레이크쇼어 도로 (Lakeshore Blvd.)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보게 된 이 열매의 색은 분명 회색이었다. 엄동설한의 토론토, 裸木들이 늘어선 주변은 눈으로 덮인 갈색이었고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별 감흥이 없는 비주얼로 그저 스치듯 지날 수 있었지만 뭔가가 달린 그 나무 앞으로 방향을 틀어 다가서게 된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사과나무였다.

나무에 다가 갈수록 사과의 모양과 색이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앞에 당도했을 때는 놀랍게도 주황색으로 빛나는 어여쁜 사과 열매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사소한 것 같은 시각적 반전 사건을 통해 느끼는 바가 많았었다. 간과되었거나 성급한 혹은 맥락에 대한 지나친 확신에 따른 판단에 따라 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다르게 다가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눈,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지 못할 경우, 얼마나 많은 사실들과 가치들이 왜곡되거나 그저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한한 인생에서 모든 기회, 모든 가능성, 모든 가치들을 모두 훑어 가며 살 수는 없다. 제가 살고자 하는 가치의 기준에 따라 우선순위를 부여해가며 좁든 넓든 제게 주어진 혹은 자신이 설정한 나름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뒤늦게,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그게 그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고, 유사한 상황을 계속 반복해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인생이다. 운 좋게 별 시행착오 없이 제 생각데로 척척 세상이 움직여 줘서 한 인생 제 맘먹은데로 신나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반대인 것인데, 여기서 내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慧眼, 즉 뭔가 통찰력이 풍부한 '눈', '판단', '결정' 등이다.
살면서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판단을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것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많은 지식과 경험, 그에 필히 수반되는 시행착오 등이 데이터베이스 적으로 축적되어 갈수록 적절한 판단을 위해 요구되는 다양한 분석의 좋은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었다. 기계에 판단력을 불어넣고 싶어 하는 인공지능의 분야에서는 정보의 최소 단위를 데이터라 부르고, 그 데이터들의 의미 있는 작은 그룹을 정보(Information), 그 윗 레벨이 의사결정을 위한 보다 고급 정보들의 집합인 지식(Knowledge), 이러한 지식들이 경험적으로 강화되면서 패턴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경험적 정보(heuristics), 이러한 정보를 manipulate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지식적 정보를 도식적 방법으로(schema) 얽어내어 총합적 패턴으로 다뤄지게 되는 전문가적 정보(Knowledge Chunk), 그리고 그러한 지식들의 상위 레벨에 놓인 widsom, 더 위에 통찰력(Insight), 이러한 계층적 구조의 지식 표현(hierachical knowledge representation)에 익숙해져 왔던 나로서는 logically 가장 밑 단의 데이터와 정보들을 많이 모으고, 즉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많이 읽고 그리고 세상 경험을 많이 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식이 쌓이고, 지혜가 쌓이고 통찰력이 증대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거다.
On the othe hand though, 禪 수행적 입장에서는 내가 취했던 상식적이고도 논리적인, 소위 통상적인 방법과는 정 반대다. 아는 것을 버리고 보편타당하지 않은 개인적 경험치에서 우러나는 모든 편향과 왜곡을 떨치고 생각조차 없는 無念無想의 경지에서 깨닮을을 얻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버림으로써 오히려 지름길로 직결되는 득도의 경지, 완전히 밝은 혜안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한다.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면서도 매우 매력적이기도 하다. 간혹 세상적 지식의 입장에서 누구보다 많은 양을 축적해 왔던 학자들이나 지성인들이 갑자기 그들의 방식을 바꾸어 모든 걸 버려야 되는 求道적 수양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메비우스의 띠처럼 자신도 모르게 '다 앎'이라는 파라다임이 살짝 꼬이면서 '전혀 모름'의 경지에 자연스레 이어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저 어여쁜 색의 사과를 그저 흑백의 둥근 열매로 여기고 그냥 지나치려 했었던 것은 내 지식과 경험치들이 가져다준 강력한 경험적, 논리적 관성으로 인한 잘못된 해석이었던 거다.
.. 겨울에 붉은 열매가 달릴 일이 없고,
.. 주변이 모든 눈으로 덮여있고 나무와 풀들은 무채색으로 말라 있었으며,
.. 아무리 호숫가 수변 도로라 지만, 이 거대 도시 중심에서 잘 익은 붉은 과실이 아직도 달려 있겠느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가져다준 강력한 constraints 들로 인해 그 예쁜 사과 열매는 내게 회색 빛 둥근 열매로 전혀 어필하지 않는 상태로 다가왔던 것이다. 붉은색을 붉은색으로 인지해야 하는 내 눈의 分光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주변의 상황과 나름의 경험에 근거한 해석은 사과의 색 조차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잠시 연출한 셈이었다. 외부의 강력한 자극이 없거나 특별한 돌출 상황이 아니면 뭉뚱그려 처리해버리는 이러한 현상은 뇌의 시각 처리 프로세스의 뛰어난 장점이기도 한데, 전체적 상황을 총괄하는 뇌 중추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스스로 기만할 수도 있는 무서운 능력을 가지기도 한다. 즉, 내가 날 믿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도 된다. 내가 배워오고 경험해 왔고 믿어 왔던 것들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거라 판단해 전혀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마음 놓고 있었던 것이 어느 날 아니라고 판명될 경우, 세상은 좀 달라 보인다. 그래서 결국 겸손 가득히, 조금은 더 실상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혜안을 주세요 라고 소망하게 된다. 단순히 주변의 사물을 보는 일에도 이렇건만, 사람들과의 관계, 조직 속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한 해석과 판단, 비교적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프로젝트 등의 일 속에서의 분석과 판단 그리고 실행, 그리고 인생의 큰 문맥에서의 판단과 결정, 이러한 과정에서 깊은 혜안 없이 처리되어 왔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서 등꼴이 오싹해짐을 느낌과 동시에 나의 '운좋음'에 다시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난 제대로 된 혜안을 갖추지도 못했으면서도 용케도 이 많은 세월을 별 탈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PS: 하지만 혜안이라는 턱없는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빅데이터로 무장한 AI에게 서비스를 요청하는 게 현실적이겠다. 고작해야 100년 정도를 살아가는 인간이 수시간만에 수천, 수억의 인간들이 수만년을 살아왔던 모든 사건들과, 지식 그리고 소위 지혜 조차도 다 소화해내면서, 하물며 죽지도 않는 인공지능을 무슨 수로 대적해 내겠는가. 사실 우린 이미 지식을 쌓고 지혜를 갖춰 살아남는 시대가 빠른 속도로 떠나가고 있음을 하루 하루 목도하고 있다. 인간은 그저 인간들끼리의 사랑에만 몰두할 수 있을 뿐이다. sadly.. or.. happ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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