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天王과 대나무 @ 범어사.2020
겹겹히 이어지는 산과 계곡, 그 사이 사이를 흘러 내리는 깨끗하고 풍부한 생명수, 울창한 숲과 수풀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 그 작은 생명들을 소중히 여기라 배우는 구도자들, 그곳에 어김없이 한국의 사찰이 자리한다.
지리적 형세에 어울려 소박하고 인간적으로 조성된 사찰의 공간적 아름다움은 구도자들의 정진을 더욱 매진하게 할것인가, 아님 마구 어지럽힐 것인가. 이토록 아름다운 공간에서 어찌 심란하지 않을수 있을까. 짓궂은 의문도 가져본다.
산속 깊숙한 곳의 협소함과 높낮이로 인한 지형적 핸디캡을 입체성으로 최대한 살리고, 적당한 크기와 모양의 목조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지며 아주 특별한 공간을 이룬다는 것이 내가 한국의 사찰을 사랑할수 밖에 없는 이유다. 거대한 단일 건물로 지어진 한국 도시들의 수많은 교회들이나 유럽의 성당, 교회들 혹은 아랍권의 모스크들이나 인도의 힌두 사원들에서 느끼는 감흥과는 너무 다르다. 시대사의 격변를 거듭하며 종교와 왕정과의 필연적 반목으로 더욱 산속 깊숙히 도피적 자리 매김을 해야 했을 한국의 사찰들은 오늘날에 와서는 축복에 다름 아니지 싶다. 더군다나 크고 작은 모든 동식물을 포함한 삼라만상을 포용하며 어울려 살아감을 표방하는 불교의 세계관은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자연 속에서 최소한의 포교 및 수행 공간만을 차지한채 그 종교적 소임을 묵묵히 행해오고 있는듯 하여 방문객의 입장에서도 다행스러움과 동시에 깊은 감사의 심정에 이르게 된다.
사찰 경내에 들어서기 위해 지나야 하는 천왕문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감흥이 달라져 왔는데 이번 경우 사대천왕의 guardian angels 로서의 의미와 소임, 그리고 조각적 관점에서의 형태와 색상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방화범에 의해 몇번이나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다 하니 더욱 그런듯 했다. 다른 종교간에 죽도록 싸우며 서로를 파괴하는 일은 지구상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진다. 정치가, 종교가, 민족이, 이데올로기가, 신념이, 또 피부색이 다르다고 서로를 억압하며 충돌해오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상상력을 마구 자극시키는 四天王의 형상은 엄청난 박력의 체구, 체구에 비해 섬세한 손놀림, 그리고 화려한 탱화 채색으로 인해 불교가 가지는 고요한 선적 분위기와 대척을 이루며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천왕문을 거치며 난 잠시나마 인간적 의미의 소박한 영적 샤워의 시간을 갖는다. 성당에 들어서 잠시 손가락 끝에 성수를 적시며 정화의 예를 갖추듯.
언젠가 부터 난 천왕상들을 바라보며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던것 같다.
난 Canadian Maple Leaf Red 색 재킷을 입고 경내로 들어섰는데, 단풍나라의 붉은색은 단청의 붉은 색에 다름 아니었다. 이번 2020년 1월의 한국여행은 내가 사는 캐나다 동네 친구 짐과 그의 아들 제이든과 함께 했었다. 역병이 횡횡하기전의 마지막 한국, 마지막 부산 이었던 거다.
생전 처음 이러한 공간과 건축물들을 대한 캐나다 대학 3년생인 제이든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더군다나 미국의 도시들과 멕시코 등 중미의 전형적인 리조트들을 제외하곤 태평양을 건너는 해외여행은 처음인 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온통 다름 뿐이었을듯 하다. 비교 대상이 없는 절대적 다름이었겠다.
나 역시 범어사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수십년전 잠시 들렀던 독일 퀠른의 대성당이 떠오른다. 도심 가운데에 축조된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수없이 많은 정교한 조각들,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 천국과 소통하는 듯한 첨끝.. 권위와 위엄, 화려함과 정교함, 완벽함 등등 종교가 절대 권력이었던 시절의 면면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찬탄을 금치못하며 바라본 대성당 이었지만 종교가 근엄할수록, 화려하고 압도적일수록, 교조적일수록 인본적 어프로치는 위축되고 인간들은 한없이 하찮게 여겨질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한국 사찰의 다양한 모습중 이들 천왕들의 모습만이 다소 과장되게 위압적이지만 그저 친근한 정도다. 부릎뜬 눈은 무섭다기 보다는 코믹하기까지 하다. 우리 고단한 인간들의 울타리를 지켜줄 것 같은 다정스럽고 든든한 수문장으로서 버티고 선 거대한 형상이 반갑게만 여겨진다.
소박함과 정결함, 비어있음, 자연친화성, 샤머니즘적 요소의 포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역시 지존임에도 단지 그 사실을 네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거라네 라는 인간 중심의 가르침이 불교를 알지도 못하고 신자도 아닌 나조차 불교 사찰의 이런 모습을 통해 계속 불교를 알고 싶게 하고 불교적 공간을 다시 찾고 싶게 한다.
아.. 대나무. 또 다른 전각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 소담스러운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곧음과 푸르름, 그리고 깨끗함의 그 신기한 나무들이 잎새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렇게 우뚝 우뚝 서 있었다. 혹심한 추위의 캐나다엔 대나무가 없다. 한국을 방문할때면 강릉 오죽헌의 검은 대나무가 보고 싶어 일부로 계획을 잡곤 했었다. 이번에도 부친을 모시고 떠난 강릉 여행에서 오죽헌엘 들렀었다.
바라 보고만 있어도 얼마나 좋은지. 평생을 봐와도 신기한 나무다. 사찰에서의 대나무는 올바른 구도자의 모습을 보는듯 해서 더욱 반가웠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의 불교를 받아들여 고구려화, 백제화, 신라화, 조선화, 그리고 한국화 해가면서 얼마나 많은 전설과 설화, 관련된 속세적 이야기들을 이어가고 있을까. 그 사상과 철학, 방법론등은 또 얼마나 많은 스토리들과 함께하며 조형화, 미술화, 예술화, 건축화, 정치화, 문학화, 연극화, 영화화 되어가며 지금껏 시대와 역사를 넘나들며 한국인들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벽화로 갓 피어난 매화는 사시사철 향을 나누며 이 공간을 찾는 이들의 삶을 위로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