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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shin Jun 16. 2016

墨畵속으로

용소폭포 계곡@남설악

전설 속 전우치가 산수화 화폭으로 말을 몰아 뛰어들어 사라지듯 시공의 너비와 깊이를 짐작하기 힘든 향기와 지질 생태학적 구성 속으로 난 아주 느린 걸음의 산책에 나섰다.

고개를 한껏 꺾어 바라본 깎아지른 암벽 위의 소나무 위에는 까마득히 솔개가 날고 있었다. 장엄하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 깊은 계곡에 땅거미가 지면서 계곡과 높은 하늘 그 사이 어딘가에 기류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저 날개를 펼치기만 하면 되었던 저 새는 부드럽고 한가로운 공기의 흐름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던지. 거대한 날개 끝은 마치 손가락처럼 깃털이 벌어져 제 마음 가는 데로 날게 해 준다. 중앙아메리카의 화산 분화구 주변 새하얀 유황 연기 속에서 대머리 콘돌 역시 이렇게 날고 있었었다. 온타리오 북쪽의 어느 골프장 그린 위에서 막 퍼팅을 하려 할 때 페레그린 펠컨은 이렇게 거대한 날개의 그림자를 그린 위로 덮으며 서서히 날아와 멀리 사라져 갔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공에서의 조우였지만 이 거대한 아름다운 포식자들의 비행은 한결같았다. 서서히 다가와 유유히 사라져 가며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 인간 세계에서는 소위 '도사' 정도나 되어야 그러한 감흥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산세와 지질적 구성이 어찌 이리 드라마틱 할까. 암벽 사이사이, 심지어 그 정상에 까지 자리 잡은 소나무들은 정말 대단해. 기막힌 조크처럼  터무니없는 생명력을 보여줌은 물론 그 의연한  늘 푸르름은 정말 비현실적이다. 칭송받아 마땅하다. 백 년을 넘어 천년을 넘어.

설악의 산세는 무궁무진 온갖 웅자와 맵씨를 가지며 수천수만 년의 풍상과 함께하고 있건만 난 내 나이 오십이 넘고 나서야, 그리고 더 이상 이 아름다운 산하에서 살지 않는 해외동포로써 잠시의 방문을 통한 관광객의 입장에서 겨우 그 모습을 대하며 감탄해 마지않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이렇게 우뚝 솟아 있고 얼마나 청량한 모습으로 이 깊고 깊은 계곡은 생명의 자양분인 물을 저 아래 세상으로 계속 흘려보내고 있을까.

인간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고 있는 한국의 산하를 보면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산 어느 강, 어느 계곡도 준비만 하면 우린 쉽게 오르내리며, 발 담글 수 있다. 유럽의 거대한 설원 알프스에서나 더욱 거대한 캐나다의 록키 산맥, 혹은 그랜드 캐년등의 압도적 자연 앞에서는 인간은 그저 왜소함을 느끼며 경탄과 함께 돌아설 뿐이었다. 그러한 거대 자연을 보기 위해 우린 인생에 한두 번 정도 정해진 루트를 따라 관광에 나설 뿐이다. 하지만 닿을 듯 잡힐 듯 지근거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한국의 산하를 대상으로는 푸근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자연의 호흡에 쉽게 동화될 수 있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언제고 그 자연의 품속 깊숙이 안겨볼 수 있는 것이다.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삭풍의 한겨울이 이리 아름다운데 꽃피고 새울고 하늘 높은 계절엔 얼마나 이쁠꼬.

도회풍의 세련된 회갈색 암석 봉우리들은 또 얼마나 잘생겼던지.

하늘로 솟아나는 나무들의 줄기와 가지들에서는 수많은 크고 작은 전설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하고.

수학적 프랙털(fractal)을 연상시키는 잔가지들의 기하학적 실루엣은 나무라는 멋진 생명체의 엄밀함과 부단함, 그리고 최적성을 엿보게 한다.

망부석처럼 곳추선 암석이 바라보는 곳은 아마도 동해 바다와 하늘, 그 중간의 어디쯤일 것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상이 혹시 고도(Godot)는 아닐까. 나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어 진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hopelessly most of the time.. hopefully from time to time.


떠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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