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인가 대학 시절이었던가, 오죽이란 말에서 전혀 까마귀나 검은색을 떠올려 본적이 없어 오죽의 오(烏)자가 까마귀 烏자고 그래서 검은색을 뜻한다는 걸 알고는 속으로 많이 놀란적이 있었다. 검은 대나무가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 푸르름의 대명사, 바람과 함께 슥삭거리는 상쾌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 푸르른 신비함의 대나무가 어떻게 검을수가 있단 말인가.
그후 강릉 오죽헌은 내게 바로 그 검은 대나무를 보기 위해 찾는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른 나라에 살면서 잠시 한국을 여행하게 되었고 또 다른 감흥으로 이 멋진 공간을 다시 대하게된거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이곳에 터를 잡았었던 역사적 위인들의 발자취는 이미 교과서적 배경으로 충분하였고 더 이상 그 내용이 자라거나 울창해지지 않는 static 한 것이라, 내 관심은 오로지 검은 대나무들이 이번엔 얼마나 더 튼실하고 dynamic하게 자라고 있을까, 그리고 그 뒤를 둘러싼 동산의 낙락장송은 얼마나 더 우거져 가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아름드리 장송들과 함께 자라나는 아기들같은 오죽의 숲을 보는 것은 이곳이 아니면 보기가 힘든 것이었다. 힘들게 찾아온 만큼 그때마다 설레임과 상쾌함이 함께 했었다.
나지막한 담장이 교차하는 이러한 곳에 은근하면서도 추상같은 오죽을 심어 운치와 기상을 더했음은, 말 그대로 대쪽 같았다던 사대부 집안이 한시대 존재했었기에 가능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에 있는 영랑의 생가에 가면 이와는 전혀 다른 명랑함과 화창함, 소년스러운 기운을 느끼는데 반해.
높낮이 따라 층층히 쌓아 쳐진 다정스러운 담장 너머로 솟아나는 대나무를 대하는 것은 감탄과 흥분이다. 너무나 아름답다. 공간을 이리 멋지게 구분짓는 전위적 아름다움은 흔치않다.
사임당의 생가에서 자라나는 오죽의 후견인이라도 되듯 생가 뒤켠을 둘러 장중하게 자리한 장송들은 언제나 거기에 우뚝 서있는 키다리 아저씨들이었다.
검은 대가 겹겹히 자라나는 모습을 엿보는 건 이상한 나라에서의 엘리스가 느끼는 심정이랄까.
오죽 숲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다 담장을 타넘으면 이조 시대로 넘어 들어들듯도 했다.
마치 버섯과도 같은 밀집 대형을 이루면서도 하나 같이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소나무들은 이곳 땅과 공간의 기운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보여준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질박한 수평 담장이다. 담장의 기반을 위한 둥근 바위 덩어리들과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회반죽 위에 켜켜이 올려진 기와는 그간의 세월에 다름 아닌데, 세상에서 가장 빨리 자라나는 식물이라는 대나무의 새롭고 푸른 기상에서 묘한 디지털적 쿨함을 보기도 한다.
견학온 학생들은 지금은 그저 핸펀 보기 바쁘지만 아마도 나처럼 나이가 많이 들고 난 후 다시 찾아올 이곳에 대한 감흥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세월과 함께 익어가는 공간의 향취를 즐길 나이가 언젠가 다가 올테니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