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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11. 2015

4. 그래도 다행일 수 있는 이유.

Fort Funston

식사가 끝이 난다. 무언가 조금 더 먹어야 할 것처럼 허한데 마땅히 먹을 것이 없다. 딱히 맛이 없거나 양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이 식당에서의 식사는 항상 묘한 아쉬움을 남긴다. 남은 반찬들을 더 먹어볼까 하다가 밥이 없어 그만 두기로 한다. 순두부를 담고 있던 뚝배기의 바닥이 보이는 걸 보니 이제 식사를 끝낼 때인가보다 싶다. 기한에 쫓기며 논문 몰아쓰기를 하다 끼니를 걸러 시작된 몰아먹기가 이렇게 싱겁게 끝이 난다. 제때 일하지 못하는 습관은 배고픔을 낳는다.


따뜻하다. 밤공기까지 따뜻한 날이 이곳에선 그리 많지 않은데 요즘은 그렇다. 이 날들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 어떻게든 붙잡아 놓고 싶다. 아직 그리 늦지 않은 저녁 시간이다. 잠깐 산책이라도 해야지 싶다. 전에 갔던 서쪽 바다를 떠올린다. 아침 안개가 걷히며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던 바닷가. 그리고 그 옆 고요한 숲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해가 지기까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바삐 차를 움직인다. 또 시간에 쫓긴다.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벌써 아름답다. 해가 지기까지 이제 한뼘 정도의 시간이 있다. 내린다. 어디부터 가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지는 해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기로 한다. 반쯤 뛰는 어정쩡한 자세로 다가간다. 나무 향이 난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온천 히노끼 탕에 앉을 때 나는 냄새가 난다. 너무 좋다. 몇몇 이들이 해가 바다와 맞닿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없다. 나도 그렇다. 무슨 대단한 묵상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멍한 상태이다. 거대한 풍경과 마주선 상황에선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해도 잘 되지가 않아 그냥 그대로 있기로 했다. 아까 듣던 빨간책방 오프닝이 생각난다. 이 생각이 없는 적막한 순간이 실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라고. 해석이 아름다우면 현실도 아름워다워지나 보다. 그저 믿기로 한다.



해가 사라져 간다. 이제 나는 산책할 준비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 숲길을 걸어야 하는데 말이다. 때가 다 지나갔다. 허둥지둥 헤매던 사이. 생각없이 빈 곳을 바라보던 사이. 아무래도 오늘 산책은 힘들겠다. 며칠 전 읽었던 을 생각한다. 독서에도 때가 있다고. 어릴 때 책을 충분히 읽은 경험이 없다면 어른이 되어서 책을 읽는 것을 거의 불가능 하다고. 읽을 순 있겠지만 외국어를 읽는 것과 같이 얕은 책읽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이다. 이제서야 책과 좀 친해져 보려는 나에겐 실망스런 얘기지만 사실이다. 읽고픈 책들은 잔뜩 쌓아두는데 영 속도가 나질 않으니 말이다. 어릴 때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어디 이것 뿐일까. 그때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그때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더라면. 그때 미국에 왔었더라면. 그랬다면 내 삶은 지금보다 더 풍성해졌을까.


그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곳이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라서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 뿐. 다가가기 주저하는 것일 뿐.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쓰고 있는 글보다는 훨씬 더 단단한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때를 놓친 나에게도 여전히 이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속상한 일이 있다며 저녁 한끼 같이 하자는 친구의 상한 마음 가운데. 멀리 있는 손자 녀석의 전화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그리움 가운데. 주말마다 거리의 이웃들에게로 향하는 한 이방인의 발걸음 가운데. 이것들에는 정해진 때가 없다. 거기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다. 그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곳이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라서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 뿐. 다가가기 주저하는 것일 뿐. 게으르지 않다면, 꾸준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삶의 공간들이 너무나도 많다. 알면서도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차로 돌아온다. 을 읽는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글쓴이의 말이 위로가 된다. 해가 수면 아래로 사라진 하늘은 얼마간 이전보다 더 붉은 빛을 발하다 이내 어두워진다. 하나 둘 주위의 차들이 떠난다. 마지막 남은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옆에 서 있다. 검은 공간을 비춘다. 작은 방 하나 정도 크기의 모래밭이 나타난다. 불빛이 아늑해서 좋다.




사진첩: instagram @ peter.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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