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SF
사라졌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글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꾹꾹 눌러쓰던 글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그렇게 사라졌다. 웹페이지를 앞으로 돌려보고 뒤로 다시 감아 뒤져봐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점심시간 먹던 카레도 옆으로 미뤄놓고 썼건만. 오랜만에 약간의 분함을 느낀다. 카레 위 남은 돈까스 한조각을 다시 씹는다. 받아들이기로 한다. 무어 대단한 글을 쓴 것도 아닌데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마침 노트북 배터리도 바닥이 난다. 그래도 이대로 안 썼던 셈 치기엔 카레를 소홀히 대했던 정성이 아깝단 생각이 든다. 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그래 배터리를 가져와서 다시 시작하자.
배터리는 실험실에 있다. 기숙사를 나온다. 오후 햇살이 맘에 든다. 다시 기억해낼 수 있을까. 걸음을 재촉한다. 다섯 문단 정도를 썼던 것 같은데. 문단 위에 문단. 그 문단 위에 사진. 그 사진 위에 사진. 그 사진 위에 다시 문단. 밑에서부터 썼던 글을 머리 속 눈으로만 훑어본다. 잔디밭 옆을 반쯤 뛰어 지나간다. 다행히도 실험실은 참 가깝다. 빠른 걸음이면 오분안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오분짜리 공간에서 후반의 이십대를 오롯이 흘려보냈다. 체육관이 있는 갈색 건물에 들어선다. 실험실로 가는 지름길이다. 파란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매일 봐도 좀처럼 질리지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반대편 문으로 나온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전원을 연결한다. 글이 사라지고 사진만 남은 페이지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다시 살려보자. 글 맨 마지막 문단을 떠올린다. 그것의 배경이었던 차 안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까 그 문장들이 스멀스멀 다시 나타난다. 제법 생각이 날 것도 같다. 마지막 문단이 모양이 갖춘다. 이전의 장소로 이동한다. 차에서 전망대로. 전망대에서 바닷가로. 바닷가에서 다시 차로. 상상 속의 내가 뒷걸음질 하고 있다. 그래도 찝찝하다. 아까는 문장의 오른쪽에 있었던 단어가 다시 쓰니 왼쪽에 와있다. 나쁘진 않은데 한 시간 전의 그 느낌이 아니다. 단어가 갓 태어났을 때의 그 느낌이 아니다. 꾸역꾸역 새글이 있던 공간을 헌글로 채우고 읽어본다. 난감하다. 거의 비슷한데 무언가가 빠져있다.
생기가 없어졌다. 날 것의 생기 말이다. 정확히 이게 뭔지는 알 수가 없다. 밖으로 나올듯 말듯한 그 간지러움.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함 속의 기대감. 서투른 것을 막 내뱉고 난 후의 후련함. 이것들 없이 다시 쓴 두번째 글은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어 있다. 이따금 여기저기 빈 단어를 채워보고 매만져봐도 아쉬움이 남는다. 모르겠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그저 그대로 두기로 한다.
하루의 끝 밤길을 걷는다. 밝을 때 바삐 걷던 그 길을 거꾸로 서서히 걷는다. 여전히 모른다. 풀이 죽어있는 내 일상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쓰면 지워지고. 지워지면 다시 써보고. 여기 있는걸 저기로 옮겨도 보고.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고 멀리 물러나서도 보고. 멈추어 보고 뛰어가도 보고. 앞을 보며 뛰어가다 뒤로 넘어져 보아도. 어째 삶이 더 진부해지는 것 같다. 적어도 오늘까진 그렇다. 그래서 오늘은 그저 모르기로 한다. 자신도 모르는 난감한 질문에 자신이 없는 답으로 자신을 가리어 포장하는 것보다, 그저 나도 모르겠다 라고 하는 것이 큰 위로가 될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냥 그렇게 고백하면 된다.
여기서도 날 것으로 시작할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날 것과 익은 것 사이 그 어딘가 경계에 있을 것이다. 그게 시든 것은 아니길 바란다. 부디 말랑하게 익어가길 바란다. 과하지 않은 단맛이 나길 바란다. 부담없이 읽힐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