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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19. 2015

7. 조용한 선구자들.

Dogpatch

낯설다. 점심을 먹으러 캠퍼스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난 길을 걷는다. 몇 년을 살아온 동네인데 여전히 남의 동네 같다. 많은 이들이 삭막하다고 말하지만 내겐 가까이 두고 싶은 낯섬이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하려 애쓴다. 인적이 많지 않은 동네이건만 간간이 지나가는 차소리가 라디오 속 목소리를 덮는다. 더 한적한 곳을 찾아 옆길로 숨어든다. 아스파트길 건너로 지금은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부둣가 공장 건물들이 보인다. 그것들을 옆에 두고 나란히 걷는다.


백자를 사진에 담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곳에서 찍은 백자 사진 이야기다. 예기치 않았던 옅은 분홍빛을 발견하고 잠잠히 감격하던 그 때를 회상하고 있다. 결코 흥분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용한 목소리에 애착이 담긴 리듬감이 느껴진다. 구본창 선생의 목소리다. 목소리가 사진을 닮았고 사진이 목소리를 닮았다. 자신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데 단단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오랜 시간 내면에서 눌러져 뭉쳐진 말들이 어디서 본 듯한 낯선 모습으로 흘러나온다. 그가 담은 백자에서. 탈에서. 서로 꿰매진 인화지에서.


늦게 시작한 것이라 한다. 사진 찍는 일 말이다. 경영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일하다 홀연히 독일로 떠난 후 시작한 일이라 한다. 식당이 가까워진다. 코너를 오른쪽으로 돌아 공장들을 등지고 걷는다. 각자의 카펫을 짜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에 어릴 적 큰 위안을 느꼈다 한다. 식당으로 들어선다. 남미의 흥 가득한 음악이 그의 목소리를 덮는다. 타코 샐러드를 주문한다. 햇볕이 반쯤 들어오는 자리에 앉는다. 각자가 다른 모습으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아직 반쯤은 다른 이의 모습을 입고 있는 듯하다. 이제 곧 이 연구소를 떠나면 온전히 내 모습을 입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도 입은 적이 없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옷을 입게 될까.  



몇 걸음 더 남쪽으로 걸어 갈색 건물의 문을 연다. 커피를 주문한다. 잘 못 알아들어 한번 더 주문한다. 카드를 긁고 나즈막한 의자에 앉는다. 유난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 본다. 이제 숨쉴 수 있을 것 같다. 조용하다. 공간 한 모서리의 자그만 까페가 꽤 규모가 있는 업무 공간을 붙들고 있다. 그 때는 오히려 고요함에 가까웠었다. 이 곳에 처음 왔던 주말. 길을 걷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높은 갈색 공간에 매료되어 무작정 들어왔었다. 홀린 듯 서있는 사이 누군가 말을 걸어왔었다. 이 작업 공간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계획에 없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차분한 열정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인신매매 방지 인권단체의 오피스로 시작한 공간이었다고. 지금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스타트업들이 함께 일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그렇다고 비영리 단체는 아니라고. 그래서 운영이 쉽지만은 않은데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이 까페도 동네 사람들에게 이런 취지를 알리기 위해서 연 것이라고. 결코 크지 않은 그의 목소리엔 작지 않은 확신이 배여 있었다.



창문으로 약간은 기울어진 햇빛이 들어온다. 유리창 저편의 차들이 이따금 바쁘게 지나친다. 이편은 조용하다. 조용한 시간들을 마주하는 데에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적막한 진공 상태에서도 불안해하지 않을 굳은 마음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영글어가고 있다는 믿음이. 준비된 때가 이르면 새롭게 잉태된 내면의 울림이 시선이 머문 곳에서 공명할 수 있을거란 소망이. 이것들이 침묵의 시간들을 넉넉히 붙들어줄 것이다. 그 시간들 끝에서 카펫 위에 새겨진 낯선 무늬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온다. 테이블 너머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새 무늬를 짜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느랗고 좁은 문을 열고 나온다.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사진첩: instagram @ peter.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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