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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22. 2015

8. 뒷담화는 아름답다.

Gladstone Institutes

"스벅 커피?" "콜" "지금 가겠음" "네 오세요" 남자들끼리 카톡은 언제나 미니멀하다. 이 정도면 꽤 정중하다 싶다. 오후 네시. 책상 앞에 앉아있어도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시간, A 형의 부르심이 반갑다. 주섬주섬 읽고 있던 인터넷 창들을 닫는다. 지메일 창만 남겨 놓고 일어난다. 연구실을 슬쩍 둘러본다. 다들 어디갔는지 몇 사람 보이질 않는다. 유유히 복도를 지나 계단이 있는 문을 연다. 아래로 아래로. 계단 끝 비상구를 열어 젖히니 좁은 길 건너 스타벅스가 보인다. 창이 어두워 안에 누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열어보니 A 형이 기다리고 있다. 눈을 반쯤 마주치며 인사한다. 뒤돌아 줄을 선다.


작은 커피를 주문한다. 웬만하면 주스를 마셨을 테지만 오늘은 커피가 좋겠다. A 형이 사준다. 참 심성이 고운 분이시다. 에어컨 바람이 차다. 우린 따뜻한 커피를 들고 따뜻한 밖으로 나가 마시기로 합의한다. 나온다. 연구소 휴게실로 다시 들어갈까 잠시 고민하다, 뒷뜰에서 마시기로 한다. 햇빛과 바람이 알맞다. 연구소 뒷문 옆에 자리한 파라솔 하나를 골라 그 밑에 앉는다. 역시 이 시간 이야기 하기엔 뒷뜰이 제격이다. 앞마당이라면 영 불편했을 것이다. 남자 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담화를 시작한다.


이야기는 한결같다. 늘 한결같은 사람들과 한결같은 얘기를 나누곤 한다. 좀처럼 지겹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왜, 우린 열심히 연구하는데 사회는 적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나. 어찌, 이 동네 집 값은 이리도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가. 어디, 싸고 먹을만한 맛집은 없는가. 언제, 우리는 결혼할 수 있을까. 육하원칙의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사이사이 잠시 잊고 있던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누구는 이번에 교수가 되었다더라. 누구는 새 차를 샀다더라. 최신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뒷담화가 뒷다마가 되진 않는 예의는 지킨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하다 싶다. 오늘은 제일 중요한 걸그룹 이야기를 빠트렸다.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오후의 점처럼 찾아오는 이 시간이. 격 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 시간이. 좀 더 희망에 찬 얘기를 나누면 더 좋을까 싶지만 이 정도 선을 지키는 것도 괜찮다 싶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니깐 말이다. 돌아보면 다 아름다울 시간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순간들을 미화할 것이다. 아주 힘차게. 눈을 들어 녹슨 파라솔을 담는다. 지루한 주차장 외벽을 담는다. 조금 달리 보면 다 매력이 있는 것들이란 걸 알고 있다. 그리워하며 찾을 거란 걸 알고 있다. 빨대에서 빈 바람 소리가 난다. 빈 컵을 빨아대고 있다. 뒷담화를 마칠 시간이다. 순간 아침에 올려놓은 냉동실 안 고등어가 생각난다. 오늘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그거면 됐다 싶다. 미련없이 일어난다.


돌아보면 다 아름다울 시간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순간들을 미화할 것이다. 아주 힘차게.





꺼내보니 고집스럽게도 얼어있다. 꼬리를 뒤틀고 있는 것이 볼품 사납다. 머리와 꼬리를 떼내어 달라고 했건만 떡하니 배만 갈라 그냥 줬던 고등어다. 좀 기다려 주기로 한다. 주방이 따뜻하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바작바작 입맛 돌게 조려질 내 고등어를 기대한다.





사진첩: instagram @ peter.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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