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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Mar 20. 2017

15. 혈의 기원을 찾아서.

35 Medical Center Way

"난 케일 생강 쥬스" 그녀의 주문은 다소 엉뚱했다. 어떤 맛일까. 쌉쌀함과 알싸함이 뒤엉킨 조화가 주말 아침을 깨우기에 제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달달한 복숭아 음료를 주문한 나를 일말의 죄책감 비슷한 것이 휘감고 지나갔다. 이윽고 나온 케일과 생강, 복숭아가 잘 갈린 액체를 들고 우린 실험실로 향했다. 언덕 위 정점에 위치한 큰 길을 건넜다. 기분 좋을 정도로 차가운 아침 공기에 몇년째 들락거리고 있는 캠퍼스 연구동의 진부함이 사라졌다.


Y박사는 주말이라 굳게 닫힌 현관문을 빗겨지나 병원 건물 한 귀퉁이에 자리한 작은 철문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열어주었다. 엘레베이터로 9층에 이른 우리는 위태롭게 허공을 가르는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줄기세포 연구동은 몇 년 전 새로 지어진 단층 건물로 이 대학병원 뒤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병원건물과 이 병원이 등지고 있는 산 사이 좁은 틈에 껴맞춘 모양새다. 단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지만 비탈을 따라 높낮이가 바뀌도록 설계되어 있어 건물의 권태로움을 덜어주었다. 



혈의 기원이 되는 곳


그녀를 따라 실험실이 내려다 보이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자, 이제 약속대로 설명해 주시지요." 알고 싶었다. 나는 지난 수년간의 실험실 생활 끝자락에서 한껏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 더 오랫동안 성실히 해 온 - 다른 이들에게 이 권태기를 버틸 수 있는 모종의 단서 같은 것을 찾고 싶었다. 불쑥 내뱉은 요청에 멋쩍은 적막을 마주했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이내 그녀는 대화의 빈 공간을 촘촘히 채워가며 그녀가 진행 중인 혈액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 몸의 피 속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다양한 종류의 세포들이 있고, 정상적인 기능을 위해서는 혈액 속의 서로 다른 세포들의 수가 균형을 이루며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지만, 세포 수의 균형이 깨져 한 가지 종류의 세포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날 경우, 혈액 속 세포들은 면역 반응, 산소 운반, 영양 공급 등의 제 역할을 원활히 할 수 없게 되어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백혈구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진 상태가 백혈병이란다. 그녀는 연신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권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역시 틈을 내어주면 안 되나보다.   


"우리 몸이 혈액 속 세포들의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포들의 모체가 되는 줄기세포(조혈모세포)의 분화와 기능을 아는 것이 중요해." 


조혈모세포 haematopoietic stem cell 는 혈액을 구성하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줄기세포를 말한다. 조혈모세포는 의외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혈관 속에 있지 않고 단단한 뼈 속에 있다. 뼈의 안쪽 가운데 공간에는 부드러운 조직이 있는데 이를 골수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혈액 속 세포들은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에서 만들어진다. "팔, 다리, 엉덩이 뼈에서 조혈모세포들을 뽑아낼 수 있지."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사람의 것을 쓸 수는 없고, 대신에 사람과 가장 가까운(!) 실험동물인 쥐가 그녀를 위해 친히 한 몸 희생을 감수한다. 그녀가 평소 가장 오랜시간 공들이는 작업 중 하나가 바로 뼈에서 줄기세포를 발라내는(?) 아주 섬세한 작업이다. 



혈의 기원을 얻는 법


그녀에게 이 섬세한 조혈모세포 채취 작업을 재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회의실 옆 계단을 내려와 그녀의 실험실로 들어섰다. 뒷동산의 푸른 숲을 배경으로 그녀의 단정히 정리된 회색 실험대가 눈에 띄었다. 일 미터 남짓 너비의 아담한 실험대가 얼룩진 곳 없이 잘 닦여져 있었다. 그녀는 그 위에 수술도구들을 하나 둘 경쾌한 손놀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스티로폼 수술대 위에는 분홍빛 핀들이 한켠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편이 낫겠지만, 이 핀들은 수술대 위에 손바닥보다 작은 쥐가 사지를 쫙 벌리고 누울 수 있도록 돕는 데 쓰여지는 도구가 맞다. "지금 쥐가 없어서 아쉽네." 생생한 현장을 보여줄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며 그녀는 작은 동물의 뼈를 정갈하게 발라내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껏 설명이 다소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험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실험용 쥐의 복지와 고통없는 죽음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말이다.) 


"피부를 열면 뼈가 보이나요?" "그럼. 뼈에 붙은 근육만 간단히 제거하면 팔, 다리, 엉덩이 뼈 깔끔하게 꺼낼 수 있지!" 그녀는 막자사발에 곱게 빼낸 뼈를 한가득 넣고 으깨는 시늉까지 해주었다. 한마리씩 할 때는 주먹만한 작은 사발을, 서너마리 같이 할 때는 밥그릇 정도의 큰 사발을 쓴다 하였다. 그렇다. 연구는 고상한 두뇌 활동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 그런 영역의 과학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생명 과학은 많은 시간 유쾌하지만은 않은 장시간의 손노동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청명한 오드득 소리가 나거든. 그럼 잘 되고 있다는거야."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녀는 고르게 빻아진 뼈에서 필요한 조혈모세포만을 분리해 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조혈모세포 표면에 있는 특정 단백질을 인식함으로 불순물을 걸러나가는 이 전 과정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연구자의 하루 일과를 오롯이 쏟아부어야 가능한 작업이다. 이 경우 하루의 소득으로 쥐 한마리당 순수한 약 5천개의 조혈모세포를 얻을 수 있다. 보통 후속 실험 한번 돌리는 데 수 만개의 조혈모세포가 필요하다고 하니 아직 갈길이 멀다. 실험은 계속 반복된다. 




그녀가 한 군데 더 보여줄 곳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으레 건물 안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건물 둘레를 따라 허공을 향하고 있다. 이렇게 약간의 엉뚱함이 허용되는 공간이 좋다. 당연한 것들만 있는 삶은 권태로울 것이다. 케일은 생강과 뜻밖의 합을 이루고, 피는 단단한 뼈 속에서 만들어진다. 의외의 엉뚱함을 발견하는 재미가, 삶을 풍부하게 한다. 반복되는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선물한다. 


이렇게 약간의 엉뚱함이 허용되는 공간이 좋다.
당연한 것들만 있는 삶은 권태로울 것이다. 의외의 엉뚱함을 발견하는 재미가,
삶을 풍부하게 한다. 반복되는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선물한다. 




옥상에 올랐다. 집이 보인다. 바다가 보인다. 바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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