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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27. 2017

16. 불이 꺼지면 보이는 것들.

알싸한 고추의 향이 입 안에 가득 메운다. 방금 마트에서 사 온 양념에 잘 버무려진 고추를 한 입 베어 문다. 이윽고 밥솥에 남은 밥을 긁어 다시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고추무침의 맵고 짭조름한 맛이 흰 밥의 밍밍한 맛과 어울려 만족감을 준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맛이다. 허기진 배를 간단히 달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저녁을 만들 차례다. 오늘 메뉴는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와 소금 간이 밴 고등어를 굽기로 한다. 우선 밥을 새로 하고 쌀뜨물에 멸치국물을 우려야겠다 생각하며 가스레인지를 켜는 순간. 틱 하는 소리. 정전이다. 



"엄마 불이 꺼졌어" 옆집 한국 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전이 우리 집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전자레인지 네모 창의 시계도 자취를 감췄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운 빠진 냉기뿐이다. 금방 켜지겠지 하며 다시 쌀을 씻는다. 괜시리 김치찌개 레시피도 다시 들춰보고 외운다. 여전히 정전이다. 마트에서 사 온 반찬과 남은 밥 몇 숟갈이 없었다면 정말 극도로 예민해졌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합의한다. 복도에 나오니 아마 옆 집 할머니일 것 같은 분이 지나간다. 전기가 나가서 엘리베이터도 쓸 수 없다, 전자 열쇠도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냐며 인상을 찌푸린다. 아내와 나는 그것 참 안됐다는 말과 공감을 표한 후 건물 밖으로 나온다. 


아파트 단지 내 수영장에는 이미 몇몇 주민들이 나와 있다. 풀 건너편에 아이들이 보인다. 요시모토 나라가 그린 소녀처럼 생긴 어린아이와 그 아이를 닮은 남동생이 보인다. 한국 아이들인 것 같다. 둘은 마냥 신나 보인다. 물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남매의 모습이 귀엽고 정겹다. 누나가 먼저 물에 발을 담그니 동생도 따라 담근다. 차가운지 눈을 잔뜩 찡그리고는 뭐라 뭐라 소리 지른다. 아이들의 재잘되는 소리와 찰랑찰랑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한국 시골 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훈훈한 밤공기도 한몫하는 것 같다. 며칠 전만 해도 이제 서늘한 가을이다 싶었는데 오늘따라 밤공기가 다시 포근하다. 불과 몇 시간 전 이 날씨 참 지겹다 생각했다. 변하지도 않고 내내 똑같은 날씨가 권태롭기 그지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날씨 참 좋다 생각한다.


가지고 나온 책을 편다. 몇 장 남지 않아 불이 켜지기 전까지 읽기 안성맞춤이다 싶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들춰보던 책인데 이제 맨 마지막 저자의 아내 루시가 쓴 에필로그만이 남았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폴은 문학과 생물학에서 그 답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다 결국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의사로서의 고된 훈련이 끝날 무렵, 그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다 이 책을 남기고 서른여섯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시종일관 정직하고 진중한 글을 써 내려간 남편의 유작 말미에 덧붙인 루시의 글은 따뜻하고 섬세하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똑같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루시는 말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없을 때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한 사람의 생이 끝난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나 보다. 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얼마 전 매린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약물로 인해 고단했던 삶을 살다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한 매린. 그러나 그녀의 삶의 마지막엔 폴 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랑과 회복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그녀의 장례식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은 매린을 통해 보았던 희망을 진솔하게 나눠주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적지 않은 이들로 하여금, 잠시 멈춰 서게 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이윽고 불이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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