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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Nov 07. 2017

17. '채소의 기분'을 듣는 기분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하루키 에세이, 좋아하시는지?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을 찾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280번 국도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일이니까. 하지만 무언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새로 나온 음반을 듣기도 하고,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간혹 아내가 같이 탔을 때는 최근 구입한 노래방 마이크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거 꽤 추천할 만합니다). 그러다가 오디오북을 들으면 재미도 있고 남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료 서비스를 신청해야 하나, 도서관에서 오디오북을 빌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예스 24 앱에 있던 '듣기 모드'가 생각났다. 다운받아 놓은 전자책 중에 하루키 에세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책이 있었다. 가끔 아내가 이 책 에피소드 하나씩 읽어주던 게 좋았었던 기억이 나서 듣기 모드를 재생해 보았다.


혹시 예스 24 앱으로 책을 들어 본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재생하려면 우선 글을 읽는 목소리를 선택해야 한다. 가을과 은혁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30대 중반으로 느껴지는 여성(가을)의 목소리와 비슷한 연배로 생각되는 남성(은혁)의 목소리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나는 가을을 선택했다. 잘 어울린다. 예전에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의 나레이션과 비슷한 모노톤의 목소리인데, 정말 기계음이어서 (그렇겠지?) 굳이 특정 부분에 웃기려고 힘주어 말한다거나 하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남성 작가인 하루키의 글에 여성의 목소리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은혁의 목소리가 하루키 아저씨를 대변하기엔 너무 모범생 같아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하루키와 아예 관련이 없는 가을의 목소리가 낫겠다 싶었다. 하루키의 글도 맥락 없이 툭툭 치고 나올 때가 많으니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어쩌다 가을과 은혁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두 이름이 서로 대등해 보이지가 않는다. 고민고민 하다가 책을 읽어주는 여성이니까 책을 떠오르게 하는 '가을'로 이름을 정하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란 어감도 나쁘지 않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예쁜 이름이야, 하며 여자의 이름을 정하고 나서는. 남자 이름은 남자니깐 그냥 강하게 '혁' 같은 거 들어가는 걸로, 그래 은혁 정도면 되겠지 하며 갖다 붙인 느낌이다 (은혁이라는 이름 자체는 좋다. 가을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다고 느껴질 뿐). 그러고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이름은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모두 부드럽고 섬세하다. 다 여자의 이름이 될 수 있다. 남자의 이름으로는... 으음 아마도 약간은 곤란하겠지요.  



이 책의 일어판 원래 제목은 '커다란 순무, 어려운 아보카도' 라네요


가을 양의 능력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는 영화 속 대사를 요리조리 곱씹는 '채소의 기분'이라는 첫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하루키가 '앙앙'이라는 20대 여성들이 주로 보는 잡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하루키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무심하게 풀어내는 화법이 매 에피소드마다 알알이 들어차 있다. 그런데 하루키의 말투와 가을의 목소리, 이 둘의 합이 너무나도 훌륭하다. 뜻밖의 발견이다. 눈으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선사한다. 예를 들어, 하루키 에세이에는 '으음', ' 어이', '무어'와 같이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말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가을 양은 이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단조롭게 읽어주다가 '으음', '어이', '무어'에서는 유독 음절의 높낮이에 변화를 준다. 게다가 이 단어를 읽고 나서는 잠시 정적마저 있어서, 하루키가 실제 혼잣말을 했더라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 하루키는 줄곧 반말로 이야기를 하다가도 곧잘 존댓말을 끼워 넣곤 하는데 (번역상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주로 곤란한 상황에 존댓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하루키의 의도적인 표현 같다), 이 존댓말도 가을 양이 맛깔나게 잘 짚어준다. 가령, "햄버거를 먹고 싶은데 1달러만 주지 않겠습니까?", "좌우로 모양이 다른 양말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와 같은 문장에서 한없이 무뚝뚝하던 가을 양의 목소리는 문장의 끝에서 별안간 상냥해진다. 그것이 적절한 대조 효과를 몰고 와서 묘한 기쁨을 듣는 이에게 선사하는데, 마치 매번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놓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양말을 조심스레 빨래 바구니에 넣었을 때 아내가 느끼는 종류의 기쁨 같은 것이다.


가을 양은 간혹 실수도 한다. "남자아이가 되묻는다. "그런데 채소라면 어떤 채소 말이에요?" 돌발 질문을 받은 노인은 당황하여 "글쎄, 어떤 채소일까. 그렇지, 으음, 뭐 양배추 같은 거려나" 하고 얼버무려 얘기는 그만 흐지부지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를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서너 문장을 다시 읽곤 하는 식이다. 전자책의 페이지가 바뀔 때 이따금 일어나는 오류인 듯하다. 에이 그게 뭐야 이거 완전 시간낭비잖아 하고 생각하는 바쁜 현대인들도 있겠지만. 뭐 길어봤자 트와이스 뮤직비디오 앞에 나오는 광고 시간보다 짧은 정도이니 충분히 참을만하다. 참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을 보는 것 같은 시공간의 중첩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게 참 이상하다. 분명히 조금 전에 들은 똑같은 문장인데 다시 반복될 때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더해진다. 텍스트 읽기가 풍부해진다.  


아무튼 책이 정말 재밌다. 덕분에 소위 하루키 라디오 3부작이라 불리는 다른 책들도 다운받아 가을 양에게 낭독을 부탁하고 있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샐러드를 먹는 사자' 제목만으로는 당최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지만 또 잘 알 것도 같은 얘기들을 차 안에서 아주 즐겁게 듣고 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에 대한 책이냐,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러니 한번 읽어 보시라. 아니 기회가 된다면 들어 보세요.  




"지바 현에서 ‘굿럭’이라는 이름의 러브호텔을 보았습니다. 애쓰십시오."와 같이 매 에피소드 끝에는 으잉 이건 또 뭔말이래 라고 느껴질 만한 하루키의 짧은 문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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